축원은 국가적 관심사에 대응하여 설행된 국가적 불교의례나 그에 준하는 불교의례에서 활용되었다. 또한 고려후기 각 종파의 참법서 간행과 유통에 대응하여 천태종의 신앙과 수행의 핵심인 삼매참의를 간행하여 천태종의 위상과 종풍을 진작시켰다.한편 고려에서는 1330년(충숙왕 17)에 무기가 찬집한 《석가여래행적송》을 간행하였다. 무기는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는 한편 민중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하는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또한, 당시 불교계의 식리축재, 파계악행을 들어 시주은을 강조하며 불교계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수계에는 세 가지 받음이 있다.첫째, 모든 불보살이 현재하는 앞에서 받음이다. 이를 통해 진실한 상품의 계를 얻을 수 있다.둘째, 모든 불보살이 멸도한 후에 천 리 안에 먼저 수계한 보살이 있으면 법사가 되어 나에게 계를 교수해 주시기를 청한다. 그리고 발에 절을 하고 ‘청하오니 대존자께서는 스승이 되시어 저에게 계를 내리소서.’라고 한다. 이로써 그 제자는 정법계를 얻는다. 이것이 중품의 계이다.셋째,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 천 리 안에 법사가 없을 때는 모든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스스로 서원하며 수계해야 한다
‘깨달음’을 이룬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천히 산속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우견편단의 붉은 가사에 합장하고 발은 맨발이지만, 눈빛은 단호하고 표정은 평온해 보인다. 산안개가 짙게 깔려 습윤한 기운이 감돌고 절벽 위에 을씨년스럽게 뻗어난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떨고 있는 듯, 발아래 가시덤불은 얽히고설켜 날카롭고 억센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정경은 대각선으로 가파르게 드리워진 기암절벽 그리고 발밑에 불쑥 솟아오른 밋밋한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며 화면에 생기를 불러오고 있다.작가는 정교한 필치로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백운암에서 보우 스님은 마지막 번뇌까지도 완전히 여읜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렀고, 조주 선사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참선한 끝에 자나 깨나, 일어서나 앉으나 일여(一如)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생사의 관문을 부수고 태곳적부터 불어온 맑은 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기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우 스님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라는 화두에서 막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힌 상태였다. 암두밀계처는 덕산탁발(德山托鉢)에서 유래한 화두이다. 하루는 덕산 스님이 공양을 하려고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가는데, 설봉 스님이 “노장님은 아직
한국불교태고종은 11월 8일 오후 1시부터 서울 광화문 육조광장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제4회 태고종 영산재와 국제수계대법회를 봉행한다. 특히 이날 국제수계대법회는 동남아 및 유럽 국가의 스님들이 7증사로 참여하는 가운데 해동율맥을 잇고 있는 수진 대율사가 전계아사리로 자리해 1만여 명의 불자들에게 계를 수여하게 된다.수진 대율사가 주석하고 있는 담양 용화사를 찾아 이날 국제수계대법회의 의의를 살피는 동시에 스님이 살아 온 수행 이력과 대외적 활동 등에 대해 물었다. 〈편집자 주〉△한국불교태고종이 처음으로 광화문 육조광장에서 갖는 국제
일을 할 때는서로 도와서 함께 하며종일토록 해서는 안 된다.봄철이라면 미리 해야 하고,겨울철이라면 오후에 하는 것이 좋다.미리 해야 할 때를 살펴그 일을 적당히 쉬게 하여걸식하는 이로 하여금손발을 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또한 마을을 오갈 때 식사 시간을 놓치게 해서는 안 된다.凡興造時苾芻相助 應一時作不應終日若在春時中前應作 若於冬月應午後作可豫察時休其事務 令乞食人得洗手足村坊往返不失食時 《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김장철이 시작됐다. 절 집에서도 이 맘 때는 대중이 모두 나와 김장 울력을 함께 한다.햇빛으
봉두난발에 미소 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수묵 선묘를 조화롭게 구사하여 그려내고 있다. 이목구비, 손, 발가락과 같은 신체 부위는 농묵(濃墨)의 구륵 선묘로 세밀히 묘사하고, 겉옷은 담묵(淡墨)의 의문선(衣紋線)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이 끊기고 이어짐을 반복하면서 윤곽의 묘미와 화면구성의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이처럼 종횡으로 거침없이 휘두른 붓놀림은 주제 인물의 선의(禪意) 양양한 자태를 그대로 화면에 드러내고 있다.이 그림 속 인물은 당나라 시대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清寺)의 은둔 승인 한산과 습득이다. 이 두 사람은
풍문에는 동산 양개 스님의 모친이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눈이 멀어서 정작 아들이 찾아왔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동산 양개 스님과 그 모친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고서 보우 스님은 부모님부터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이르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향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두 눈을 감고 걸어도 집에 찾아갈 수 있을 만큼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떠나온 그 길 그대로였다. 보우 스님은 노란 씀바귀꽃이 귀향길을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집 앞에 도착하니 부는 바람에 끼익 끼익, 사립문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고, 어머니
3. 선종의 동향과 사상13세기 선종은 수선사(修禪寺)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는데, 지눌(知訥)과 혜심(慧諶) 이후 무신정권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제4대 혼원과 제5대 천영이 차례로 주석하면서 수선사는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 선종계의 수선사는 지눌의 저술 이외 《육조법보단경》, 《정법안장》, 《종경촬요》, 《선종송고련주집》등을 간행하였고, 특히 굴산문 담진 이래 송나라에서 신경향의 선종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구산선문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자산문과 법안종의 전통을 가진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사 지
가을달이 두터운 구름에서 나투매보는 중생마다 함께 기뻐한다네법왕의 지혜 광명은저 하늘 환한 보름달처럼미묘한 빛깔 모두가 즐겁구나어둡고 긴 밤의 밝은 등불이세상 모든 안목의 길잡이가 되어주듯세간의 지혜로운 이는 어둠을 제거하니법의 광명은 항상 중생을 밝히누나猶如秋月出重雲 衆生見者皆歡喜法王智光如滿月 如睹妙色無不樂冥寂長夜如明燈 爲諸眼目作先導世間智者能除暗 恒以法光照衆生《대방등대집경보살염불삼매분(大方等大集經菩薩念佛三昧分)》-작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남송 시대 선승 화가 양해(梁楷)의 작품이다. 화면의 구성에서 볼 때 양해는 간결한 선과 담아(淡雅)한 수묵으로 포대 화상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포대 화상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 자상(慈祥)한 눈빛, 그리고 쇄탈(灑脫)한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초연함을 느끼게 한다. 이 구도는 양해 특유의 뛰어난 회화기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선종에서 주창하는 초월적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그림 속 포대 화상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양해의 간결한 붓놀림은 포대 화상의 표정, 눈빛, 자세를 비롯한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마을에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이제 집에 돌아올 때가 됐다고 아낙들이 밖에 나가 노는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옆에서 개들이 꼬리를 흔들면서 컹컹, 짖어댔다. 굴뚝 위로 퍼지는 하얀 연기를 보고 있으니 보우 스님은 군침이 돌았다. 그 군침은 단순한 식탐이 아니라 사무치는 그리움의 표현이었다.만행의 길 위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볼 때마다 보우 스님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겠답시고 공연히 광대놀음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환속해서 고향집으로 돌아가 참한 색시와 혼인을 하고 부모님을 모시
선재 동자는 부처님의 말씀에 이제는 자신도 선지식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예. 이제부터는 깨달음의 지혜로 중생들을 구제하면서 자비심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이에 보리가 말했다.“우와아! 오빠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멋지고 위대한 사람같이 느껴지는데? 진짜 오빠도 부처님같이 듬직해 보여.”그 말에 부처님과 문수 보살을 비롯한 모든 보살이 웃었다. 한참 후, 선재 동자는 보리와 함께 삼배를 올리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문수 보살이 살그머니 다가와, 말없이 보리를 안아 주었다. 부처
Ⅰ. 서언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 특히 고려후기의 불교사상과 문화에 있어 14세기는 선종(禪宗)의 시대로 보고 간화선(看話禪)을 중심으로 한 선사상의 유행, 메뉴얼로 제시된 선적(禪籍)의 유행, 인가 중심의 구법(求法) 등으로 확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고려불교의 다양성이나 고유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본고에서는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14세기 고려후기의 고려와 중국의 교류에 대해 상호교류라는 관점에서 고려불교의 사상과 문화교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고려불교에 대해 중국불교의 수용
“농가에서 곡식을 심은 후, 많은 곡식을 수확해서 대광주리에 가득 담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이듬해에 다시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경작을 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많은 곡식을 다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다시 곡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도를 닦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탐하는 것이 없게 되면 마침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과연 그렇습니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하나둘 수확을 시작한다. 추수를 마친
이 그림은 인물의 하반신은 생략하고 상반신만을 클로즈업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아마도 카메라 기능처럼 사물의 찰나 순간을 포착하는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그림을 이런 재능을 두루 갖추고 있던 남송 시대 선승 화가 목계의 작품으로 단정하기도 한다.순간의 찡그린 표정, 미소짓는 얼굴을 단번에 포착하여 생동적 이미지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 큰 머리, 넓은 이마, 그리고 활짝 웃는 웃음은 마치 이목구비가 하나로 움직이는 듯하다. 이마, 코, 입, 턱은 U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가사는 몇 번의 필획(筆劃)으로 처리하고
회기는 그를 수좌로 삼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고사하고 서기로 남았다. 이 기간 동안 대흔은 천목산에서 중봉명본(中峰明本) 스님과 만났다. 한밤중에 산중에 강풍이 몰아치고 암석이 떨어지는 등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흔은 편안히 좌선을 이어갔다. 이를 본 중봉은 그의 정력을 칭찬하였다. 그 후 대지4년(1311)에 대흔은 호주 오회사의 주지로 초청받아 설법을 펼쳤으며, 그의 스승 회기원희는 그가 훌륭한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연우 7년(1320년), 항주의 대보국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여러 존숙들이 대흔에게 재건을 부탁하였다. 처음에
보우 스님이 불각사에 읊은 오도송에서 고요함(靜)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의미했다. 보우 스님은 《원각경》을 통해 일체가 모두 멸하는 부동(不動)의 경계를 깨달았다. 여기서 움직임(動)이란 우주법계의 모든 현상을 뜻하지만, 현상의 이면에 내재된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고요하게 있었다.보우 스님은 게송에서 번뇌 망상이 사라진 경계를 서리에 의해 잡초들이 사라진 자리로, 초월적 세계의 실상이 드러난 경계를 활짝 핀 국화로 비유했다. 게송에 무(無) 자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평소 무자화두를 참구
보리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진 선재 동자의 마음을 알아차린 미륵 보살이 다그치듯 그에게 말했다.“선재야, 너는 옛날에 나와 함께 도를 닦다가, 보리심을 잃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구제 하기 위해 대 바라문의 집에 태어났었다. 이제 인연이 다해 여기로 온 것이니 몸을 바꾸게 되면 다시 도솔천에 태어나 일체의 지혜를 이루고, 깨달음을 얻어 너와 문수와 똑같이 평등한 자리에서 나를 보게 되리라. 그러니 문수를 찾아가서 다시 한번 보살행을 묻고 보현행을 닦거라.”미륵 보살의 말에 슬픈 마음이 사라지면서, 정신이 번쩍 든 선
옛날 어떤 사문이 산길을 걸어가다가, 속옷이 풀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는 곧 주위를 살핀 후, 천천히 옷을 제대로 여미며 다시 갖춰 입었다.그때 산신(山神)이 나타나 물었다.“이곳은 어떤 사람의 옷도 땅에 떨어진 일이 없는데, 당신은 왜 바닥에서 낮은 자세로 옷을 입고 계십니까?”사문이 답했다.“산신께서 지금 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위를 살펴보면 해와 달, 하늘이 지금의 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昔沙門於山中行道 裏衣解墮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