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임제종의 법맥 전승 개요〈3.끝.〉
—석옥청공과 태고보우의 사제 계승 관계를 중심으로
회기는 그를 수좌로 삼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고사하고 서기로 남았다. 이 기간 동안 대흔은 천목산에서 중봉명본(中峰明本) 스님과 만났다. 한밤중에 산중에 강풍이 몰아치고 암석이 떨어지는 등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흔은 편안히 좌선을 이어갔다. 이를 본 중봉은 그의 정력을 칭찬하였다. 그 후 대지4년(1311)에 대흔은 호주 오회사의 주지로 초청받아 설법을 펼쳤으며, 그의 스승 회기원희는 그가 훌륭한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연우 7년(1320년), 항주의 대보국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여러 존숙들이 대흔에게 재건을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조맹부(赵孟頫)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사찰 재건을 맡았다. 대흔은 4월에 절에 들어가 대규모로 토목 공사를 시작했으며, 곧 절을 재건했다. 원래 사람들이 점유한 절의 토지도 되찾아 절의 발전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했다. 태정 2년(1325년), 강절행성의 승상 탈환(脱欢)이 그를 중천축사(中天竺寺) 주지로 초청하였다. 전해지기로, 탈환은 사찰 주지를 임명할 때 당시 큰 사찰의 주지는 명망과 덕행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흔의 명망은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의 없이 대흔의 명성이 날로 자자해졌다. 대흔 선사의 주요 저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일부는 어록이고 즉 중천축사, 집경사, 오회선사, 대보국사에서의 설법 기록이며 또한 ‘사회어록’이라 불렸다. 다른 일부는 주로 시문, 제문, 발문, 서문 등의 문집으로 편찬된《포실집(蒲室集)》이고, 총 15권이 있다. 대흔 선사의 선법은 우집이 요약하기를 다음과 같다.
“제자들에게 감정의 얽힘을 벗어나고 무지의 상태에서 떠나 본성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도록 가르쳤다.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여 이끌어주고 지원하며, 자극과 격려로 잠재력을 끌어내고, 결단력 있는 방식으로 의혹을 해소하였다. 기지와 임기응변을 교대로 발휘하여 독립적으로 교법과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남선(南禪)의 단도직입적인 본성 지향의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간거간 계통에서는 각안(觉岸)이 편찬한 《석씨기고략(释氏稽古略)》4권과 념상(念常)이 저술한 《불조역대통재(佛祖历代通载)》20권이 있다.
소륭(绍隆) 선사의 두 법계 중 숭악계(崇岳系)에는 고림청무(古林清茂, 1262~1329) 등이 주요 인물로 있다. 반면, 조선계(祖先系)는 더 번성하여 많은 유명한 선사들이 배출되었다. 그중에는 무준사범(无准师范) 이후의 설암조흠(雪岩祖钦) 선사, 고봉원묘(高峰原妙), 중봉명본(中峰明本) 등이 포함된다.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는 속성이 서(徐)씨이며, 오강(吴江) 출신이다. 15세에 출가하였고, 16세에 삭발하고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는 천태교학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0세에 정자사(净慈寺)에 들어가 스스로 3년 안에 선종을 배우겠다고 결심하였다. 22세 때 그는 단교묘륜(断桥妙伦)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묘륜은 그에게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으며,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던졌고, 원묘는 이 문제에 깊이 몰입하여 화두를 참구하였다. 그는 종종 화두에 몰입한 나머지 속옷만 입은 채 화장실에서 나오는가 하면, 상자를 열고도 잠그는 것을 잊고 떠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설암조흠(雪岩祖钦)을 찾아가 법을 청하였다. 처음에 조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나, 원묘의 여러 차례 시도 끝에 그를 받아들였다. 조흠은 그에게 ‘무(无)’ 자 공안을 참구하게 하였고, 원묘는 매일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으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조흠은 어느 날 그에게 “누가 네 시체를 끌고 여기까지 왔느냐?”라고 물은 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를 때렸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지만, 원묘는 오히려 더 강한 결심으로 참선을 이어갔다. 후에 설암조흠이 남명(南明)으로 떠나자, 원묘는 경산(径山)으로 가서 선수행하였다. 반월(半月) 뒤 꿈속에서 단교묘륜이 언급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의심이 폭발하였고, 그는 연속 3일 밤낮으로 잠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득 깨달음을 얻었고,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하안거 후, 그는 남명으로 가 조흠에게 깨달음을 증명 받았다.
조흠은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누가 네 시체를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원묘는 크게 소리쳤다. 조흠이 막 지팡이를 들자, 원묘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를 때릴 수 없습니다.” 조흠이 물었다. “왜 때릴 수 없느냐?” 원묘는 소매를 털고 떠나 버렸다. 다음 날, 조흠이 다시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원묘는 답했다. “개가 뜨거운 기름 판을 핥는다.” 조흠은 말했다. “네가 어디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배워왔느냐?” 원묘는 말했다. “바로 스님께 의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원묘의 기봉(机锋)은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다.
원묘는 후에 천목산 서쪽의 사자암(师子岩)에 머물며 관문을 닫고 수행하였다. 그는 학인들에게 다음 세 가지 관문을 던지며 가르쳤다.
“태양은 하늘을 비추어 어디든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건만, 왜 구름 한 점에 가려지는가?”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지만, 왜 한 발짝도 밟을 수 없는가?” “온 대지가 불구덩이라면, 어떤 삼매를 얻어야 타지 않을 수 있는가?”
중봉명본(中峰明本, 1263~1323) 선사는 고봉원묘의 제자로, 속성은 손(孙)씨이며, 전당(钱塘) 출신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법에 관심을 가졌고, 종종 산 정상에서 참선하였다.
《경덕전등록(景德传灯录)》을 읽다가 의문이 생겨 천목산으로 가 고봉원묘를 찾아 배웠으며, 그곳에서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10여 년간 고봉을 따라 수행한 후, 그는 원묘에게 인가를 받았다.
“우리 자신의 모습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부처님도 볼 수 없다. 다만 이 못난 제자가 자신의 반쪽 코를 보았네.”
이후 명본은 각지를 참학하며 수행하였는데, 그가 도착하는 곳마다 그 땅이 보배로운 곳으로 변했다. 속인들은 저절로 감화를 받았으며, 국내외 학자들은 그를 흠모하여 대선사(大和尚)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초상을 그려 공경하며 참배하였고, 혹한 혹서에도 끊이지 않았다. 선사를 찾아 뵈러 온 사람들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찰이 꽉 찼다. 멀리 서역, 북정(北庭), 동이(东夷), 남조(南诏)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Ⅲ。석옥청공과 태고보우의 사제 계승 관계
석옥청공은 상서(常熟) 출신으로 속성은 온(温)씨이다. 처음에는 흥교숭복사(兴教崇福寺)에서 영유 스님(永惟师)을 따라 출가하였고, 20세에 삭발하고 3년 후 구족계를 받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사찰 앞을 지나가며 천목산(天目山)에 가서 고봉원묘(高峰原妙)를 찾아뵈려고 하자, 석옥청공도 동행하기를 청했고, 기쁘게 따라나섰다.
고봉과 만나자 고봉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석옥청공은 대답했다.
“위없는 큰 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고봉은 말했다.
“위없는 큰 법은 어찌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해야 한다.”
이에 석옥청공은 말했다.
“오늘 제가 큰 스님을 직접 뵈었으니, 큰 법이 무엇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고봉은 속으로 그를 중히 여겨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万法归一,一归何处]’라는 화두를 주어 참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깨달음을 얻지 못한 석옥청공은 고봉에게 작별을 고했다.
떠나기 전, 고봉은 그에게 말했다.
“온 지역에는 눈 먼 당나귀가 있고, 회 지역에는 급암(及菴)이라는 선사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야 한다.”
석옥청공은 건양(建阳)으로 가 급암종신 선사를 찾아뵈었다.
급암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석옥청공은 대답했다. “천목산에서 왔습니다.” 급암이 물었다.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석옥청공은 말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급암은 다시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석옥청공은 대답하지 못했다. 급암은 말했다. “이것은 죽은 말이다. 네가 어떤 열병에 걸렸기에 이렇게 되었느냐?”
석옥청공은 가르침을 청했다. 급암은 말했다.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러선 안 되고, 부처가 없는 곳은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석옥청공은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급암은 말했다. “이것 역시 죽은 말이다.” 이에 석옥청공은 땀이 비 오듯 흐르며 부끄러워했다.
얼마 후, 급암은 다시 그를 불러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석옥청공은 대답했다. “말에 오르면 길이 자연히 보입니다.”
급암은 질책했다. “6년이나 여기 있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이에 석옥청공은 분노하며 떠났는데, 길을 가다 우연히 정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순간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돌아가 급암에게 말했다.
“부처가 있는 곳에 머물지 말라는 것도 죽은 말이고, 부처가 없는 곳을 빨리 지나가라는 것도 죽은 말입니다. 저는 오늘 살아 있는 말을 이해했습니다.”
급암이 물었다.
“어떻게 이해했는가?”
석옥청공은 말했다.
“청명절에 비가 막 그치니, 가지 위에서 꾀꼬리가 맑은 소리로 지저귑니다.”
급암은 그의 깨달음을 인정했다. 석옥청공은 수년 간 급암 밑으로 배우다가, 마침내 작별을 고하며 떠났다. 급암은 그를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훗날 너와 같은 감실에서 함께할 것이다.”
급암 선사가 호주(湖州)로 옮기자, 석옥청공은 다시 그를 따라갔다. 급암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제자는 불법의 바다에서 세속의 얽매임을 넘어 마치 금빛 비늘처럼 빛나는 것과 같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석옥청공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석옥청공은 후에 탁암호(卓菴湖)의 하무산(霞雾山)에 머물며 직접 나무를 하고 채소를 심었다. 얼마 후, 가화당호(嘉禾当湖)의 새로 창건된 복원선사(福源禅寺)에서 그를 2대 주지로 초청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출가자는 불법을 널리 전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아야 합니다. 혼자 유유자적하며 사는 것이 어찌 선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는 마음을 바꾸고 사찰의 학인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7년간 이곳에서 주지를 지낸 후, 노쇠하여 다시 천호(天湖)로 돌아갔다. 지정 연간, 그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알려져 황후가 금란가사를 하사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임종 시, 석옥청공은 붓을 들어 게송을 남겼다.
“푸른 산은 썩은 시체로 더럽혀질 필요가 없고, 죽은 후에는 흙으로 묻힐 필요도 없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삼매진화(三昧真火)는 없고, 단지 앞뒤 없는 한 줌의 장작불일 뿐이다.”
이 글을 쓰고 붓을 내려놓은 그는 입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81세, 출가한 지 54년이었다. 그는 《어록(语录)》 2권과 《산거시(山居诗)》를 남겼다.
유장래복(豫章来复)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석옥청공은 깊은 선정에 들어 마음을 관조하며 본성을 훌륭하게 깨달았다. 그의 말은 억지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넓은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그가 지은 산거 게송은 한산자(寒山子)의 풍격을 물려받았으며, 법회에서 대중들에게 한 법문은 직접적이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어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깨우침을 주었다. 이것이 어찌 앵무새처럼 흉내내는 사람들이 의식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석옥청공 선사는 임제종(临济宗)의 선법(禅法)을 전수하며 학인들을 깨우치는 한편, 시(詩)를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아 중생을 인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공헌은 고려불교에 끼친 영향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태고보우 선사(太古普愚, 1301~1382)이다. 태고보우 선사는 46세가 되던 1346년 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에 도착해 대관사(大观寺)에 머물렀다. 당시 원나라 황제는 태자의 생일을 맞아 보우 선사를 초청해 반야경(般若经)을 설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보우 선사는 남쪽으로 떠나 축원성(竺源盛) 선사를 찾아갔으나, 이미 축원성 선사가 입적한 뒤라 만나지 못했다. 다행히 그는 축원성 선사의 제자인 홍아종월동백(弘我宗月东白)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선종의 기봉(機鋒)에 대해 견해를 나누었다.
홍아종월동백은 태고보우 선사에게 세 가지 화두를 내놓으며 그를 시험했다.
첫 번째 회두는 출가해 도를 닦는 것은 오직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도와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두 번째는 삼천 리 떨어져 있어야만 할 텐데, 분명히 확실한 일이 마주 보고 있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 번째는 두 손을 펼쳐 말하길, "이것은 제2구인가? 아니면 제1구인가?"
보우 선사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세 가지 질문에 명쾌하게 답했다.
“고불로 가는 길을 잘라버리고, 사자와 같은 외침으로 불법을 크게 선포해라. 남쪽 둥지를 되돌려주었으며, 그 어떤 행동과 의도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태양처럼 밝고, 숨기지 않아도 칠흑 같은 어둠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바로 이곳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남은 독의 고통은 꿀처럼 달다.”
홍아종월동백은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곳에 수많은 승려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장로께서 비로소 선사와 만났으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나 태고보우 선사는 작별을 고하며 떠났다.
축원성 선사의 문도들과 헤어진 태고보우 선사는 석옥청공 선사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만나자, 《이웅존자 시원증행장(利雄尊者谥圆证行状)》에 따르면, 보우는 석옥청공에게 자신의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옥청공은 매우 놀라워하며 그를 시험해 보았고, 그의 작품을 칭찬하며 인가를 표하였다. 《석옥청공선사탑명(石屋清珙禅师塔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 제자가 있었으니, 이름은 태고보우(太古普愚)로 고려 사람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직접 교법을 얻었으며, 게송으로 그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게송에 ‘금린상직구(金鳞上直钩)’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는 태고보우 선사가 석옥청공의 법맥(法脉)을 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원나라 시기에 임제종의 발전은 매우 번성하였으며, 특히 남방 임제종은 대혜종고(大慧宗杲)와 호구소륭(虎丘绍隆) 두 파로 나뉘어 발전했다. 그 문도들은 서로 참방하며 배우는 전통을 이어갔고, ‘간화선(看话禅)’을 중심으로 임제 선법을 강남 지역에 널리 퍼뜨렸다. 특히 고려의 승려들, 예를 들어 태고보우, 나옹혜근(懒翁慧勤), 백운경한(白云景闲) 등이 원나라로 와서 임제 선법을 배우고 돌아가 고려에 이를 전파하였다. 이로 인해 임제종의 선법은 고려에서도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중국 계량대학교 인문외국어대학 학장, 길림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