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고려후기의 불교사상과 한·중 불교문화교류③

축원은 국가적 관심사에 대응하여 설행된 국가적 불교의례나 그에 준하는 불교의례에서 활용되었다. 또한 고려후기 각 종파의 참법서 간행과 유통에 대응하여 천태종의 신앙과 수행의 핵심인 삼매참의를 간행하여 천태종의 위상과 종풍을 진작시켰다.
한편 고려에서는 1330년(충숙왕 17)에 무기가 찬집한 《석가여래행적송》을 간행하였다. 무기는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는 한편 민중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하는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또한, 당시 불교계의 식리축재, 파계악행을 들어 시주은을 강조하며 불교계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친원 천태종계와는 대조적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에 들어 역관 출신의 권문세족 조인규 가문에서는 천태종 승 혼기(混其)와 조인규의 아들 삼장법사 의선(義旋)을 비롯해 4대에 걸쳐 천태종에 출가하여 묘련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의선(1284~1348 추정)은 조인규의 넷째 아들로 묘련사에 출가하였는데, 만의사와 묘련사의 중창에 관여하였다. 그는 원 황제로부터 ‘삼장법사’호를 받았고, 연도의 대연성사에 주석하였으며, 아울러 충선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연도에 머물면서 창건한 보은불광사에 주석하였다. 그는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귀국하여 충숙왕에게 건의하여 묘련사를 중창하였다. 그는 《예념미타도장참법》을 원도에서 간행하여 그 경판을 고려 민천사로 이치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원도에서 행해진 예참이 고려에 전래되어 타 종파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들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경전 신앙을 전개하는 한편, 료원(了圓)은 《법화영험전》을 편찬하여 법화영험을 중시했다. 천태종에서는 13~14세기에 다수의 천태종 예참서를 편찬하고 유통하여 천태종의 의례 불교를 정립하는 점에서 타종파와 구별되고 특히, 려말선초에는 천태종의 불교의례와 의식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태법사종’으로 전개된 점에서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Ⅲ. 고려후기 한·중 불교 인적 교류

1. 중국 승려의 고려 불교계 교류 및 활동

고려에 입국한 원나라 승려는 1304년 입국하여 활동한 철산소경(鐵山紹瓊), 1326년의 지공(指空), 14세기 중엽의 무극장로(無極長老) 등이 있다. 1304년 원나라의 강남에 있던 철산소경은 해로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철산소경은 임제종 몽산덕이(蒙山德異)의 법통을 이었는데, 고려후기 몽산의 간화선풍이 유행하는 가운데 사법제가(嗣法弟子)가 고려를 방문한 셈이다. 소경의 입국을 주선한 인물은 당시 원나라에서 유력하고 있던 충감(沖鑑)이다. 충감은 중국의 강남 지역을 유력할 때, 소경의 도행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려로 와서 3년간을 수행하였다. 또한, 1354년에는 호주(현, 절강성 호주시) 하무산 천호암의 승려 법안이 해로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이렇듯 고려와 원의 불교계간 활발한 교류와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1344년 전후 1369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회암사에는 원나라 승 무극장로의 기록이 확인된다. 자료의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견설신룡강이구 전신입발대여침(見説神竜降已久 全身入鉢大如鍼)

이는 원의 초석 범기(楚石 梵琦, 1296~1370)가 고려의 회암사에 머물고 있는 무극장로에게 보낸 서신이다. 원의 초석 범기는 임제종 대감하 제21세 원수행단(1255~1341)의 법사(法嗣)로 대혜종고파에 해당한다. 범기는 명주 상산현인으로 가흥부 수수현의 본각사와 해염현의 천녕사에서 도화(道化)를 폈다. 무극장로의 출신은 분명치 않고, 다만 범기의 게송에는 회암사, 오관산, 통도사, 강릉 오대산, 금강산 등의 주요 불교 성지를 나열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에 대한 정보가 교류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 임제종의 대혜파 범기의 서신은 태고와 나옹이 사법한 호구소륭파 이외의 교류 내용을 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무극은 고려와 원에서 활동한 승려 가운데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다. 우선 원대의 무극장로는 철산소경의 제자인 무극도선사를 들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무극선사(1268~1332)는 오흥 조씨로 송나라 종실이며, 몽산덕이의 법사인 철산소경의 체도 제자로 현요(玄要)를 묻고 뒤에 원오극근의 법사인 호구파의 급암종신(及庵宗信)에게 나아가 법을 들었다. 기타 무극의 전기는 소략한데 국외로 떠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당시 고려의 이곡(1298~1351)은 무극의 문도인 경초가 원의 전당으로 돌아가는 1329년(충숙왕 6) 이후 1333년 1월 이전으로 추정되는 즈음 무극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당시 남악하(南嶽下) 21세인 앙산흠선사(仰山欽禪師)의 법사인 광산무극원선사가 있지만 철산소경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또한 남악하 제18세인 육왕인선사의 법사인 무극관선사가 있지만 이들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 그 상관성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한편 무극은 고려의 불교계 인물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태고보우는 1339년에 소요산 백운암에서 원나라 승 무극을 만나 석옥청공 등 원나라의 임제종의 계파 및 정보를 듣고 입원을 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 인도 출신의 지공(指空)은 원도에서 활동하던 중, 1326년 3월 고려에 와서 1328년 9월까지 2년 7개월 체류하면서 불교계와 교류하였고, 원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고려말 불교계를 주도한 태고, 나옹, 백운 등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지공이 입적한 뒤 회암사에는 그의 사리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지공의 고려 불교계 활동으로는 승속에게 안선, 수계와 계법 전수, 범어 불전의 교정, 불적의 성지인 금강산 순례 등이 있다. 기타 원나라 승으로 고려 불교계와 교류한 인물로는 담당법사(湛堂法師) 성징(性澄)이 지치 연간(1321~1323)에 고려에 와서 천태 서적을 구하여 돌아간 바 있다. 한편, 고려 충렬왕대 원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을 전독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 사신과 함께 전경 의례를 설행하였는데 그 의례 설행의 절차나 목적은 분명치 않다.

2. 고려 승려의 중국 불교계 교류 및 활동

고려와 원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1270년대부터는 원도인 연경으로 향하는 육로를 통하여 공·사적 교류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불교 교류 역시 대부분 육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에서 이전 시기와 구별된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반까지의 고려승의 입원구법 관련 자료는 단편적이고, 그들이 이용한 교통로는 대부분 분명치 않은 가운데 해로를 이용한 입원구법승으로는 백운경한(白雲景閑), 진각천희(眞覺千熙), 식무외(式無外) 등 일부에 그친다. 원감국사 충지는 충렬왕 12년(1286) 4월 수선사의 제6세 주법이 되었고, 이후 역마를 타고 중하에 이르러 원 황제를 만났다고 하여 육로를 통하여 원나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1290년에는 유가업의 혜영이 사경승 100명과 함께 원나라로 갔다. 1300년 이후 화엄종의 우운, 약란, 천태종의 달목과 의선, 선종의 굉연, 유가업의 해원, 고림청무(1262~1329)와 교류한 진장로, 1335년 무렵의 혜월과 달죽 등도 육로를 통하여 갔다. 이들은 원도인 연경을 찾은 뒤 강남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거나 고승을 찾아 구법하였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모두 단편적인 것으로 그 교류 내용은 상세치 않다.

충렬왕 21년(1295)에 요암원명, 각원, 각성, 묘부상인 등 8인이 휴휴암의 몽산덕이를 방문하였고, 1296년 12월에 내원당 대선사 혼구,상락공 금방경, 시중 한강, 재상 렴승익, 금흔, 리혼, 상무 박경, 류거 등 10명이 휴휴암의 몽산을 찾고자 하였다. 대선사 혼구 등이 몽산을 면대코자 한 시기는 충렬왕이 공주를 비롯 신하 243인, 시종 590인을 거느리고 세자의 혼인과 하정을 위하여 원나라에 간 때로, 충렬왕 22년(1296) 9월21일부터 1297년 3월 9일까지 약 6개월간의 이동과 체류에 해당한다. 그 입원 노정은 1296년 9월 21일 개경을 출발하였고, 요동을 경유하여 1296년 11월 17일에 연경에 이르는 육로였다. 당시 혼구의 일행이 강남에 있던 임제종 승 몽산을 방문하였다면 연경에서 육로나 수운을 이용하였을 법하다.
14세기 중엽에는 한국불교사의 주요 고승들의 입원구법이 있었으며, 그 노정은 육로에 해당하며 해상의 이용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태고보우는 1346년에 연도에 있다가 강남으로 가서 남소의 수성의 문인과 교류하였다. 이어 호주 하무산 천호암의 석옥청공에게 나아가 가사와 주장자를 신표로 받고 연도로 갔다가 1348년 봄에 고려로 돌아왔다.

태고보우의 행장을 살펴보면, 그의 입원구법의 행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바로 연도에 도착한 것으로 미루어 육로를 통한 것으로 판단된다.
나옹은 1347년 11월에 고려를 떠나 1348년 3월 13일 원도의 법원사에 도착하였다. 이어 지공을 찾아 법을 구하고 나서 약 10년간 불적 순례와 구법 활동을 전개하였다. 혜근은 ‘정해십일월발족향북 무자삼월십삼일행도대도법원사’라고 하여 육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이동한 약 4개월의 여정이었다. 또한 나옹은 원도를 떠나 절강성의 명주 지역으로 가서 구법하였고, 다시 원도에 돌아와 체류하다가 육로로 요양 지역을 거쳐 귀국하였다. 따라서 나옹의 입원구법은 출국과 귀국 모두 육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나옹의 1348년부터 10년간의 입원순례는 원나라의 지공과 처림에게서 법을 구하고, 천암원장 등 호구소륭계의 고승들을 역방한 시기였다. 또한 명주의 관음신앙 성지인 보타낙가산, 석가사리 신앙성지인 아육왕사 등 주요 불교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나옹의 입원 순례는 원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교지 등 동아시아 제국의 불교계 인물들과 교류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원도에 체재한 천태종의 삼장법사 의선은 《예념미타도장참법》을 간행하면서 일본승의 서문을 받았는데, 이는 원도에도 많은 일본승이 있었고 이들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14세기 중국과의 교류에는 육로와 해로가 모두 사용되었는데 해로를 통한 불교 교류를 살펴보면, 식무외는 14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해로를 통하여 입원구법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가정집》에 관련 시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해로를 통하여 명주로 입원구법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경한은 고려말 1351년에 입원구법을 떠나 임제종의 석옥청공에게 법을 구하고 1352년에 해로를 통하여 귀국한 사례에 해당한다. 입원시 경로는 상세치 않지만 귀국의 경로는 《백운화상어록》에 비교적 상세하다. 경한은 1351년 5월 17일에 호주 하무산 천호암의 석옥청공을 방문하여 게송을 올렸고, 다시 1352년 정월 상순에 천호암의 석옥청공을 찾았으며, 상원 9일 전날에 무심과 무념의 진종에 계합하였다고 한다. 이어 석옥청공을 떠나 휴휴암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건적들이 도처에서 횡행하여 뱃길이나 육로가 모두 막혔기 때문에 1개월간 객식으로 휴휴암에서 머물렀다.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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