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의현의 무위선(無位禪) <2> 임제의 선은 바로 자각의 종교이다. 인간 누구나가 자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불교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 있음을 깨우쳐 아는 것이 진정한 자각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生佛不二]고 해도 거기에는 구체적인 인간이 실재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 한가운데 실재하는 인간은 곧 생명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그 생명은 자각한다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무자각한 상태로 남아 있다해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본래성으로 작용할 뿐이다. 단지 그것을 스스로가 좌선과 자각이라는 수행 내지 반성을 통하여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생명의 실현이다. 생명의 실현은 자기 혼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뭇 존재가 생명으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바로 이와 같은 뭇 생명이 자기와 무관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연기의 자각이요, 연기의 자각을 통한 개인적 체험이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소승교와 같이 공에 집착해도 불가능하고, 대승교와 같이 고원한 진리 또는 작불(作佛)에 집착해도 그것은 단견과 상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해탈이 아니다.진정한 자각이란 자기 속의 자기[自性] 곧 주인과 자기 밖의 자기[人間] 곧 손님이 불이(不二)임을 깨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본래부터 부처를 여윈 적이 없고 부처 또한 자신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부처를 찾고 믿으며 화두가 화두를 드는 것이어야 한다. 중생으로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화두는 본래부터 화두 그 자체이어야지 화두를 대상으로 삼아 화두를 든다면 그것은 맹구우목(盲龜遇木)과 같이 우치한 수행이 될 뿐이다. 소리개가 날개치면서 허공에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헤엄쳐 뛰어오르는 것은 내가 소리개가 되어 직접 하늘에 날아오르는 것이고 물고기가 되어 물속을 헤엄쳐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성의 자각을 통한 선수행의 완성이 곧 보살행으로서 뭇 생명의 가치실현이다. 그 자각화된 보살행은 임제선의 특징으로서 동적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이 중시되었다. 그것의 활작용한 표현이 다름아닌 방(棒)과 할(喝)의 활용이었다. 때로는 비처럼 때로는 우뢰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는 할과 방은 임제가 타인과 벌이는 문답상량을 중심으로 일종의 견성법문으로 전개되었다.여기에서 문답상량에 대하여 혹자들은 초논리적·모순적·비유적·즉물적인 표현방식으로 구사하였다. 이 문답상량이 정형화된 것이 곧 임제의 할이었다. 할이 초기에는 임제의 문답으로서가 아니라 본래인에 대한 이법으로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많은 제자들을 제접하려는 고정화된 방식으로 현성되었다. 이처럼 고정화 내지 정형화 되어가는 일종의 접화행위는 고인의 일화 내지 언어와 신체행위 등이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어 갔다. 그 정형화된 접화행위를 따라 덕지덕지 연지찍고 곤지찍어 고인의 경험에 대한 간접체험을 하려는 참구태도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후대에 간화선이 등장하였다. 선의 생명은 불도를 수행하고 깨치는 것이다. 깨침이란 사량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천지우주와 자기가 하나가 되어 분별심이 사라지고 관찰대상인 도리와 관찰주관인 지혜가 불이일체(不二一體)가 되는 무애청정한 작용이다.이와 같은 작용으로 이끌어들이는 데에 사용된 선의 테크닉 가운데 하나가 임제의 할이다. 할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을 애태우고 놀려주는 희롱도 아니다. 할 자체가 깨침으로 나아가는 도구 곧 수단의 성격이면서 동시에 임제 자신의 온전한 투영이었다. 그러기에 임제에게는 제불과 일체중생은 오직 일심일 뿐 별다른 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일심은 무시 이래로 일찍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일찍이 멸한 적도 없었으며, 푸른 것도 아니고 누런 것도 아니며,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유에 속하지도 않고 무에 속하지도 않으며,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오래된 것도 아니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일체의 한계와 문자언어와 흔적과 상대[對待]를 초월해 있는 당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생각만 하려 해도 어그러지고 만다. 허공과 같아서 그 가이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은 달리 차별이 없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달리 부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달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수처작주의 도리이다.또한 이 마음은 밝고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에 한 점의 모양과 흔적도 없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가지고 무엇이라 생각할라치면 곧 법체에서 멀어져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다만 일심을 깨쳤을 뿐이지 달리 그 어떤 자그마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 그것이 곧 입처개진이다. 이런 경지에서 임제는 수처(隨處)가 입처(立處)이고 입처(立處)가 그대로 작주(作主)였으며 작주(作主)가 그대로 개진(皆眞)일 수 있었다. 이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은 곧 법이기 때문이고 무심이기 때문이다. 수처와 입처의 도리를 깨치면 분별사려가 사라진다. 때문에 언어도단 심행처멸이 된다. 그 도단(道斷)과 심멸(心滅)이야말로 곧 본원청정불(本源淸淨佛)로서 사람마다 모두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그것이다.이런 존재가 바로 이임제의 방과 갈로 수처로 입처로서 생명체를 지닌 모든 존재는 제불보살과 일체(一體)로서 다르지 않다는 개진(皆眞)이었다. 개진에서 바야흐로 산도 좋고 물도 좋으며 말은 언제나 옳고 이치는 언제나 진실하며 행동은 언제나 원만하다. 이런 까닭에 작은 몸은 작은 소리로 설법하고 큰 몸은 큰소리로 설법한다. 종을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린다. 개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개미의 형상으로 설법하고, 파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파리의 형상으로 설법을 한다. 이 도리가 참으로 평등하고 청정한 불세계를 현성한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수처개진(隨處皆眞)하고 입처작주(立處作主)하며 현처일심(現處一心)이고 멸처무심(滅處無心)이다. 이러한 태도가 터득되었을 때가 곧 중생제도에 나아가는[臨濟] 때이고 자성의 지혜를 비추어보는[慧照] 때이다. 임제의 이와 같은 사상과 그 자유롭고 활달한 선기는 이후 송대선의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제457호> 0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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