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임제의현의 무위선(無位禪) <1> 중국 당나라 말기에 형성된 선종오가(禪宗五家)는 혜능의 법계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소위 남종 계통에서 분파한 선종의 다섯 종파를 일컫는 말이다. 남종의 원류는 중국 선종의 초조로 간주되는 보리달마로부터 태조혜가 - 감지승찬 - 대의도신 - 대만홍인 - 대감혜능으로 이어지는 일군의 법맥이었다. 혜능으로부터는 사법제자가 43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원행사와 남악회양의 계통이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 남악회양의 선법은 마조도일 - 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의현에 이르러 그 선풍이 자못 발전하였는데 그 선풍을 임제종이라 하였다. 임제종풍은 임제록이라는 그 어록을 위시하여 사가어록 등에 잘 나타나 있다.임제의현(臨濟義玄)은 임제혜조(臨濟慧照)라고도 하는데 진주지방에서 크게 활약한 선사로서 선종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걸출한 선자였다. 그의 일대기로서뿐 아니라 그의 행위와 사상에서 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었고, 가장 잘 전해준 선사였다. 때문에 임제를 바탕으로 하여 선은 비로소 선이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고 그 긍정을 모든 존재에게까지 적용하였으며, 자신의 본래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쉼없이 추구한 선자였다. 따라서 선은 달마를 통해 씨앗이 뿌려지고 혜능을 통해 뿌리가 내렸으며 마조를 통해 줄기가 번창하였고 임제를 통해서 꽃이 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임제의 기본적인 사상은 당나라 시대에 형성되고 전개된 소위 조사선(祖師禪)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곧 철저한 현실긍정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각을 통한 자유무애한 행위를 유감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것이 임제에게는 절대무위인(絶對無位人) 곧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드러나 있다. 그 인(人)은 곧 주체적 인간이다. 현실에 주하면서 현실을 단순한 관념의 세계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의 입장에서 진리를 구가하여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가식없이 정나나(淨裸裸)하고 적쇄쇄(赤灑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기성의 질서를 타파하고 인간 본래의 가치를 주장해 온 임제의 언행은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든가 방할(棒喝)과 같은 것이 임제선의 특색이 되어 거기에서 일종의 유형화(類型化)가 시작되었다.임제의 인본사상(人本思想)은 개개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하였다. 그것은 일체의 가식을 떨구어버리고 순수한 인간과 대면하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한순간만이라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항상 우리네 주위에서 늘상 나타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내부에서 부정하고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그래서 임제는 그것을‘무위진인이라니, 이 무슨 똥막대기 같은 소리인가.’하고 도리어 무위진인이라는 어조마저 철저하게 쳐부순다. 한 승이 나서서 임제에게 예배하자 임제가 문득 할을 하였다. 그 승이‘저를 어쩌려고 하지 마십시오.’하자 문득 대번에 크게 고함을 질러버렸다. 이것이 곧 할이다. 일체의 언설에 대한 분별과 진리에 대한 사량과 타인에 대한 비교를 순간적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임제는 할을 하였다. 할을 통해서 임제는 철저하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진인과 어디까지나 바람이 부는대로 물결이 치는대로 살아가는 손님의 역할을 정반대로 바꾸어버린다.한 승이 임제에게‘손님과 주인이 따로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임제는‘손님과 주인이 엄연히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본래성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본질을 벗어나 허망한 환상을 추구하는 소위 어리석은 성인들에 대한 질책이다. 그것을 위해서 임제는 때로는 누구든지 주장자로 후려치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대저 불법을 위해서는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제 스스로가 황벽을 모시면서 세 차례나 불법의 근본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으나 번번이 주장자로 얻어맞았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쑥대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할 뿐이었다. 임제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초심의 그 기분을 스스로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심정으로 제자를 후려쳤다. 세 차례 얻어맞은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기도 하고, 중생과 부처와 임제 자신이기도 하며, 불과 법과 승이기도 하고, 임제 자신이 내세운 삼구법문이기도 하다.이와 같은 임제선법의 스타일은 가르마를 탈 필요도 없다. 단지 몽땅 그렇게 살아가고 몽땅 그렇게 수행하며 몽땅 그렇게 깨치고 몽땅 그렇게 맛을 보여주면 되는 것으로 부분이 따로 없이 하나의 전체일 뿐이다. 불법은 애써 힘쓸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아무 탈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밖을 향해 공부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고 입처개진(立處皆眞)하는 도리이다. 그래서 수처작주가 곧 그대로 입처개진이 된다. 이와 같은 임제의 행동은 자신의 주인과 손님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자각을 하는 자신과 자각을 통해서 깨침을 얻는다는 그 집착의 잘못까지를 말끔하게 비워주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여의고서는 신(神)이든 불(佛)이든 자성(自性)이든 무엇이나 마찬가지로 일체에 대하여 무소유(無所有)·무소득(無所得)·무소위(無所爲)가 아니라면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없다. 요컨대 성불이든 좌선이든 그 진실한 의의가 해탈에 있는 이상 불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하고 좌선에 집착하고 진리에 집착하고 신에 집착하고 죄에 집착하고 자비에 집착하고 은총에 집착하고 그 어떤 것에 집착하든지간에 그것이 굴레라는 점은 마찬가지여서 진실한 성불이라 할 수 없다. 불이란 자재한 사람·평상무사한 사람·일체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때문에 본래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몰자각하고 있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자각이란 곧 분별하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분별 속에 작용하는 무분별의 주체를 어떻게 깨치는가 하는 과제가 선에서 추구하는 자각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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