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한국 사회는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라는 오래된 질문 앞에 섰다. 노동조합법 제2조와 제3조 개정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만든다.
노란봉투법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 노조법 제2조는 ‘사용자’와 ‘쟁의행위’의 범위를 확대한다. 기존에는 직접 고용한 사업주만을 사용자로 인정했지만, 개정안은 노동 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까지 포괄하여 사용자 개념을 확장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교섭권을 현실적으로 강화한다는 취지다. 둘째, 노조법 제3조는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다. 기업이 쟁의행위로 발생한 손실에 대해 노조와 조합원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어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법안의 취지에 대해 찬반 양측은 극명하게 대립한다. 노동계 및 진보 진영은 법안이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을 현실화하는 발걸음이라고 주장하지만, 경영계 및 보수 진영은 기업 경영의 예측 가능성을 훼손하고, 손해배상 제한이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노사 갈등을 격화시킬 것이라고 반발한다. 이 팽팽한 논쟁의 한복판에서 1980년대 노동자의 절규를 담은 박노해의 시 한 편은 법안이 품은 복합적인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서른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 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 어쩔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 이/ 솟아오를 때까지 - 박노해, 「노동의 새벽」 부분
시의 화자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 행위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삭인다. 그의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라는 독백은 삶에 대한 체념이자 끝내 이겨내야 할 노동 현실에 대한 절박한 통찰을 담고 있다. 법적 보호의 그늘 밖에서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라며 되뇌는 목소리는 오늘날 생존의 벼랑 끝에 선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노란봉투법은 이러한 절망을 딛고,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의 생존 기반을 보장하려는 현대적 시도다.
그러나 노란봉투법이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올지는 불확실하다. 이 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인 한편 사유재산권과 기업 경영의 자유를 지키려는 주장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경영계는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법 해석의 혼란을 야기하고, 파업 범위를 무한정 확대해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는 국내 투자와 신규 채용을 위축시키고, 해외로의 생산기지 이전을 가속하는 등 고용시장 전반에 부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 또한, 노사 간 강경 투쟁만을 부추기고 사회적 갈등을 격화시킬 수도 있다.
노란봉투법이 노동 문제의 해답을 모두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법안은 분명 분열이 아닌 소통, 대립이 아닌 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법의 모호성을 줄이고 상생의 규칙을 마련하는 일이 선행된다면, 노란봉투법은 노동과 자본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회적 계약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이며, 그 안에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연대의 책임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