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산지 승원’은 창건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 ‘산사’는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을 포용하고 있다. 특히 부석사를 비롯한 ‘산사’의 승가공동체는 선 수행의 전통을 신앙적으로 계승하여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고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하고 있다. 요컨대 유네스코가 지정한 ‘산지승원’은 창건부터 현재까지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으며, 다양한 불교신앙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 선(禪) 사상과 수행 풍토가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수행 공간을 의미한다. 때문에 산지승원은 그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석사 역시 해동 화엄의 초조(初祖)인 의상조사의 창건으로 화엄사상이 크게 현창되었고, 선불교의 전래와 함께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桐裡山門)의 개산조인 혜철(慧徹, 785~861)선사와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 무염(無染, 800~888)선사가 어려서부터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원융국사 혜일(圓融國師 慧日, 964~1053)이, 조선시대에는 사명 유정(四溟 惟政)이 주석하면서 선교학(禪敎學)의 명맥을 면면히 계승했던 곳이기도 하다.

부석사의 수행 전통은 현대에도 지속되었다. 1997년 봉황산에서 이름을 딴 봉황선원(鳳凰禪院)이 과거 취현암의 자리에 문을 열었다. 봉황선원은 부석사 경내에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개원 당시에는 12평의 좁은 공간에 8명이 모여 참선을 했다. 선원이 신축된 것은 고운사 주지로 재임할 당시 고금당선원을 개원하고, 백일 동안 하루 18시간 용맹정진하는 가풍을 조성하였던 현봉 근일(玄峰勤日)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근일은 경봉·향곡·전강·구산·성철 등 한국 근현대불교의 대표 선지식들에게 직접 참선 지도를 받았다. “철저하게 버리고 철저히 수행하라”는 용맹정진의 가르침으로 오랫동안 대중을 이끌어왔다.

1980년 당시 의성 고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6교구 본사였지만, 퇴락하고 낙후된 사찰이었다. 당시 주지 소임을 맡은 근일은 철야 참선법회를 시작해 사부대중의 공부를 철저히 지도했다.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토요일에 1박 2일간 300여 명에 이르는 사부대중이 더불어 참선하는 수행이었다. 대중들은 수행 도중이라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근일을 찾아가 문답을 이어갔다. 새벽 세 시에 도량석과 새벽예불을 한 뒤 아침 공양을 하면 공식적인 참선법회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다음날까지 남아 개별적으로 기도와 수행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수행풍토였다. 안거 때도 하루 17~18시간씩 백 일 동안 용맹정진을 이어갔다. 재가자들도 그렇게 매진하는 출가자들의 모습을 보고 더욱 신심을 내어 정진에 동참했다. 철야 참선법회는 직장인들을 배려해 밤 9시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고운사의 수행은 부석사에서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부석사에서 진행된 유구한 수행 풍토는 봉황선원이 2002년 문을 닫으면서 단절되었다.

이 글은 전통사찰 부석사가 소재였지만, 수행 전통과 불교중흥이 단절될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한국불교가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절이 지닌 지정학적 위치이기 보다는 독특한 출가자의 수행정신과 재가자의 신앙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 명상이 불교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템플스테이가 대중화와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다들 불교세의 하락이 출생율 저조를 탓하고는 있지만, 자구책 마련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크게 부족한 점이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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