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 26. -푸른 옷의 동자들을 만나다
용문산 상원암에서 보허 스님은 천한 사람들의 벗이길 자처했다. 보허 스님이 미륵불 앞에서 12대원의 기도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문둥이 아낙과 맹인 사내만이 보허 스님의 뒤에 서 있었으나,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나중에는 1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은 없었다. 더러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부가 소식을 듣고서 왔다가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서는 발길을 끊었다. 세상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만이 보허 스님의 기도에 귀 기울였다. 보허 스님은 맹인에게는 밝은 눈이 되어주고, 농암에게는 두 귀와 입이 되어주고, 불비에게는 팔다리가 되어주고, 몸이 병든 사람들에게는 건강한 신체가 되어주고,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는 맑은 정신이 되어주고 싶었다. 백천만억 중생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드높은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12대원을 세우고 기도한 지 3년이 흘렀다.
보허 스님이 용문산 상원암을 떠나는 날 미륵불 앞에서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서 몰려왔다. 차오르는 슬픔에 목메어 한탄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차마 죽지 못해 간신히 하루를 견뎌야 하는 그들에게 보허 스님의 비원(悲願)은 추운 겨울날에 함께 모여 쬐는 모닥불과 다르지 않았다. 그 따뜻한 기운으로 인해 그들은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바랑을 짊이진 보허 스님을 보자마자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둥이 아낙이 보허 스님에게 보자기를 건네면서 말했다.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주먹밥을 조금 쌌습니다.”
문둥이 아낙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서 문둥이 아낙이 입을 뗐다.
“누구도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던 우리 같은 천한 것들도 스님 덕분에 불법에 귀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드넓은 덕이 고려 전역에 퍼지고 나아가서는 원나라까지 퍼지길 빌겠나이다.”
말을 마치고 문둥이 아낙이 천천히 합장 반배했다. 문둥이 아낙의 말이 끝나자마자 많은 사람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앞을 보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귀가 어두워서 입 모양을 보고서 말뜻을 이해하는 아이도 있었고, 아궁이에 땔감을 넣다가 발작을 해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간질을 앓는 아낙도 있었다. 가엾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니 보허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뜨거워졌다. 보허 스님이 느끼는 감정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대자(大慈)의 감정인 동시에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대비(大悲)의 감정이었다. 보허 스님은 《유마경》 내용이 떠올랐다.
문수보살이 다른 대중과 함께 병들어 누워 있는 유마힐 거사를 문안하였다.
“병환은 좀 어떠십니까? 부처님께서도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병은 어째서 생겼으며,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을까요?”
유마힐 거사가 대답했다.
“모든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습니다. 만약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미혹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미혹에 세계가 있으면 병도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중생들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보살도 병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대비심에서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앓고 있는데 자신만 건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제 가족만 배부를 수는 없었다.
몸이 됐든 마음이 됐든 어딘가 한 군데씩은 다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한 3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3년 동안 12대원을 세우고 기도하면서 보허 스님은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은 뒤 보허 스님은 시선을 돌리다가 바닥에 버려져 있는 청자의 사금파리를 보았다. 사금파리는 햇빛을 받아서 금은보화처럼 번쩍였다. 아픈 것들은 반짝이게 마련이었다. 아프게 반짝이는 게 어디 저 사금파리뿐이겠는가? 청천 하늘에 잔별이 많듯 우리네 인생에는 수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꽃들은 나뭇가지를 찢고 피어나지 않는가? 인고의 세월을 버터야 자신만의 향기를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아프게 아프게 빛나는 별들은 밤하늘의 상흔인지도 모르겠다. 보허 스님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번뇌는 본래부터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와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지만, 번뇌가 있어야 보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환자가 없다면 의사가 필요 없듯 중생이 있기에 불보살님도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생채기도 언젠가 아물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일 것입니다.”
보허 스님의 말을 듣고서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젖 달라고 울다가 엄마의 젖을 배불리 먹은 뒤 살포시 웃는 갓난애의 표정이었다. 보허 스님은 속으로 되뇌었다.
생사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거기 물들지 않고, 열반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생사의 바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살의 행이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서도 그 애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다.
《유마경》의 내용을 떠올리자 보허 스님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보허 스님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허 스님도 맞절을 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니 보허 스님은 떠나기가 쉬웠다. 걸음걸이도 가볍게 느껴졌다.
보허 스님이 상원암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고인 물은 썩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선의를 갖고 시작한 12대원 기도였다고는 하나 그 기간이 길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생불(生佛)처럼 떠받드는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보허 스님은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운수(雲水)가 되어서 구름 흐르는 데로 물 흐르는 데로 걸음을 옮겼다. 보허 스님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개경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였다. 보허 스님은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어느덧 33세, 적지 않은 나이였다. 보허 스님은 나약하고 게을러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념으로 보허 스님은 감로사 승당에서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정진했다. 정진하다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일까?
푸른 옷을 입은 두 동자가 보였다. 한 동자는 푸른 유리병을 들고 있었고, 다른 동자는 푸른 잔을 들고 있었다. 동자들은 유리병의 물을 잔에 따르더니 보허 스님에게 건넸다. 세상의 이치를 일시에 깨닫기로 한 듯 동자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곡두에 홀린 사람처럼 보허 스님은 동자들이 시키는 대로 잔의 물을 단번에 마셨다. 동자들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신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합장 반배하고 사라졌다. 동자들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것 같았다. 보허 스님은 속이 훤히 비치는 물처럼 자신의 몸이 투명하게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팔을 들어서 보니 살은 보이지 않고 살 속의 빨간 핏줄과 흰 뼈만 보였다. 그러다가 핏줄과 뼈마저도 투명하게 바뀌었다. 시선을 돌려서 가슴을 내려다봤다. 심장은 보이지 않는데 펄떡이는 심장 소리만 들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정적만이 감돌았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신체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 신체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듬는 꼴이었다. 작은 허공(虛空)이 큰 허공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꼴이었다. 허공의 몸은 안팎이 없었다. 나는 어디 있나? 나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누군가 소리쳤다.
“일어나십시오. 스님.”
보허 스님을 깨운 건 감로사 주지스님이었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