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에서 법맥의 전승③
—한국불교태고종의 조파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편양문파를 살펴보자. 편양문파는 청허계 중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조선후 기 전국 사찰의 2/3를 청허계가 장악했다고 하는데 청허계의 대부분이 사실상 편양문파이고 보면 이 문파의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언기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매우 소략한 편이다. 언기는 묘향산과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그의 제자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편양문파가 활동하였다. 제자 중에는 풍담의심(楓潭義諶, 1592~1665)이 가장 뛰어났다. 그는 언기의 적전으로서 묘향산과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화엄경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의심은 화엄학을 중시하면서 스승인 언기와 달리 선교일치를 주장하였던 것 같다. 그의 비문을 지은 이서상(李端相, 1628~1669)은 비문에서 청허와 편양에 이르러 선교합일이 되니 스님이 그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인식은 휴정과 언기가 선교합일을 주장했다기 보다 의심 당시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휴정과 언기는 선승교열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을 선교합일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의심의 제자로서는 상봉정원, 월담설제, 월저도안 등이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다음은 부휴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휴계는 병자호란 이후 순천 송광사 및 지리산 화엄사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순천 송광사는 부휴선수가 주석했던 사찰이고, 지리산 화엄사는 그 제자 벽암각성이 중창한 사찰이었다. 청허계의 태고법통에서는 보조지눌이 배제되었지만 부휴계에서는 보조지눌의 유풍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청허계와 다른 점이다. 본래 순천 송광사는 고려 중기 보조지눌이 중창하여 수선결사를 했으며, 고려 말에는 나옹혜근이 주지를 했던 곳이다. 그러므로 송광사의 법맥으로 보자면 송광사 주지를 했던 나옹혜근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부휴계는 나옹법통설을 외면한 채 태고법통설을 수용하였다. 〈부휴대사비문〉을 지은 백곡처능(白谷處能)은 ‘임제 이후 24세 적손은 부휴’ 라고 하였고, 백암성총(柏巖性聰)은 부휴계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지눌을 산성으로 존중하되 태고법통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부휴계의 적전은 부휴선수를 비롯하여 벽암각성→취미수초→백암성총에게로 이어진다.
부휴선수는 청허휴정과 동문으로 부용영관의 제자이다. 휴정이 선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때 도총섭으로서 활약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부휴선수는 그다지 사회적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학인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던 모양이다. 광해군 원년(1609) 가을에는 순천 송광사의 요청으로 제자 400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부휴계와 송광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부휴선수는 광해군 4년(1612) 4월에 황혁(黃赫, 1551~1612)의 역모사건으로 무고를 당해 궁중에서 국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다. 《해동불조원류》에 이름을 전하고 있는 제자로는 벽암각성을 비롯하여 송암계익, 뇌정응묵, 송계성현, 고한희언, 보감혜일 등이 있는데 선수의 법을 이은 제자는 벽암각성이다.
벽암각성은 황혁의 역모사건 때 스승인 선수와 함께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조정 대신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 같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1624)에 각성을 불러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에 임명하였던 것은 그의 명성이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팔도도총섭은 제1대 휴정, 제2대 의엄(생몰년 미상, 휴정의 제자)으로 이어지며 청허계가 담당하였다. 인조 역시 처음에는 도총섭에 유정의 제자인 송월응상을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응상이 고사함에 따라 각성에게 도총섭을 맡긴 것이다. 각성은 남한산성 축조의 임무를 맡아 전국에서 모여든 승군을 지휘하였으며, 이로부터 국가의 부역에서 부휴계가 주도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관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또한 각성은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 부휴계의 사찰을 중수하여 청허계와 더불어 조선후기 2대 계파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각성은 항상 ‘무’자 화두를 들었고 후학들에게도 무자 화두를 삼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로 볼 때 부휴선수의 임제 법맥이 각성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성은 교학도 경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제자들이 대체로 교학을 중시했던 데에서 스승의 유풍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취미수초, 백곡처능, 모운진언이 유명하다.
4. 한국불교태고종 전승 조파와 그 의미
조선 후기 불교계는 임제종 단일 교단이었고 태고법통설을 공인하였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파별 구분은 있었지만 법맥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거의 모든 승려가 태고보우의 후손이었고, 청허계나 부휴계의 문파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문파불교가 해체되고 새로운 종파불교가 성립하는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국 사찰을 관리하기 위해 1902년(광무 6)에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를 설치하고, 그해 7월에 ‘국내사찰현행세칙’을 반포하였다. 한편 불교계는 사회의 근대화에 발맞추어 불교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06년에 ‘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는 등 근대적 교육을 통해 불교를 쇄신 하고자 하였다. 또한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이회광(李晦光)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그런데 이회광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힘을 빌려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자 젊은 승려들은 국가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불교마저 일본에 넘기려 한다며 강력히 규탄하였다. 그래서 박한영 (1870~1948), 한룡운(1879~1944)을 중심으로 ‘임제종’을 창립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선풍을 지키고자 하였다. 19세기 후반 경허선사에 의해 간화선풍이 새롭게 흥기하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이 임제종에 참여하여 전통적인 간화선을 진작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면서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종명을 정하여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원종과 임제종은 폐지되었다. 일제는 30본사를 정하여 통제하였으며, 그 본사의 주지들은 대부분 일제의 불교정책을 수용하여 본사 주지회의를 최고의 의결기구로 인정하였다. 그 후 불교계는 1940년에 현재의 조계사 자리에 ‘태고사’를 건립하여 총본산으로 정하고 ‘조선불교조계종’으로 종명을 개정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를 벗어난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였다. ‘조선불교조계종’은 그해 9월 서울 태고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사찰령을 부정하고 ‘중앙총무원’을 두어 행정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에는 종명을 ‘조선불교’로 개정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불교청년당’, ‘조선불교혁신회’ 등 종단의 재야 혁신단체들은 집행부에게 좀 더 강력히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도록 압박하였다. 이 때문에 종단 집행부와 혁신 단체의 노선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결국 혁신단체들은 1946년 12월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선학원(禪學院)을 중심으로 ‘불교혁신총연맹’을 발족하였다. 당시 종단 집행부와 혁신단체 사이에 가장 큰 갈등은 승려의 결혼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결혼을 인정한 승려’들은 스스로를 ‘교화승’이라고 불리고 싶어했지만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승려’(이하, 비혼승)들은 그들을 ‘대처승’ 이라 불렀다.
일제의 승려 결혼 허용으로 당시 80% 이상의 승려들이 결혼하였는데 혁신단체들은 승려의 결혼 금지를 통해 전통불교로의 회귀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불교혁신총연맹은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을 부정하고 별도의 종단기구로서 ‘조선불교본원’을 발족시켰다. 이로써 한 개의 종단에 두 개의 집행부가 세워져 종단이 사실상 양분되었다. 이처럼 종단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해방 후 남한 지역을 신탁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은 불교계의 사찰령 폐지 요구를 무시하고 일제의 사찰령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946년 11월에 공포된 미군정령 제21호에 의해 일제가 실행하였던 모든 법률 및 명령을 존속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48년 5월의 총선거로 들어선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개선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불교계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전쟁 이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국가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불교계도 전쟁으로 파괴된 사찰을 재건하고 종단개혁에 착수하였다. 비혼승 측이 초래한 교단분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5월 20일부터 1955년 12월 8일까지 8차례에 걸쳐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유시를 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54년 11월 5일 비혼승 측은 총본산이었던 태고사(현재의 조계사)에 진입하여 종명을 ‘불교조계종’으로 개정하고 ‘중앙종무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종단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분쟁에서 정권의 지원을 받은 비혼승이 우위를 점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 자 교화승들은 종단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주요 사찰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 정권은 양측을 중재하였고, 마침내 1962년 4월에 비혼승과 교화승의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내부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비혼승과 교화승 간의 분쟁은 지속되었고 결국 1970년 1월에 교화승들이 ‘한국불교태고종’(이하 태고종)으로 종단 등록을 함으로써 비혼승 종단의 조계종과 교화승 종단의 태고종으로 분리되었다. 태고종은 결혼 여부를 따지지 않고 출가를 허용하였으므로 결혼한 승려와 결혼하지 않은 승려가 함께 승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비혼승과 교화승의 충돌 과정에서 1954년 11월에 비혼승이 권력을 등에 업고 총본산이었던 태고사를 점령하여 종명을 ‘불교조계종’으로 바꾸고 사찰명을 ‘조계사’ 로 바꾼 사건은 태고종과 조계종의 당시 법맥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혼승 측이 ‘태고사’를 대신하여 ‘조계사’라고 바꾼 것은 조선후기 이래 이어오던 태고법통의 인식을 조계법통으로 바꾸고자 한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1940년 불교계가 ‘조선불교조계종’이라 개명할 때 ‘조계’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국립 순천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