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에서 법맥의 전승②
—한국불교태고종의 조파를 중심으로

 

한편 1637년에 휴정의 제자 제월경헌(霽月敬軒, 1544~1633)의 문집이 편찬되었는데 그 서문을 쓴 회백(懷白)은 “나옹 아래 일곱 번 전해져서 청허에 이르렀다”고 하여 다시 나옹법통설을 주장하였다. 제월경헌은 임진왜란 때 선교양종판사에 제수되었던 인물로서 휴정으 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회백이 나옹법통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스승인 제월경헌의 평소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당시 청허계는 두 가지 법통설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사명유정과 제월경헌의 문파는 나옹법통설을 지지하였고, 편양언기를 비롯한 다른 문파는 태고법통설을 주장하였다고 여겨진다.

3. 불교계의 태고법통설 공인과 문파불교의 전개

휴정의 제자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은 1634년에 간행된 《설선의(說禪儀)》〈후발(後跋)〉에서 “임제 직전의 경우는 석옥청공으로부터 청허휴정에 이르는 8, 9위는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다” 라며 나옹법통설을 강하게 부정한 바 있었고, 또 허균에게 사명당의 비문을 요청했던 사명유정의 제자 혜구와 만나 법통설에 대해 상의하고 나옹법통설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1640년에 해안이 쓴 〈유명조선국자통광존자사명당송운대사행적〉의 말미에 나와 있다.

“못난 제자 해안은 오석령 망주정의 말석에 앉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사명)대사의 문하에 있는 적전 제자인 혜구·단헌 등과 전국에서 온 문도들이 서로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청허는 부처님의 63대이고, 임제의 25세 직계 자손이다. 영명은 법안종이고, 목우자는 별종이며, 강월헌은 평산에서 분파하였다.’ (허균이 찬술한) 비문에서 사명당이 임제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한 것은 그 차례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지혜에 눈멀고 귀먹은 후세 사람들이라면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더 전하려 할 것이니, 어찌 (지혜의) 귀와 눈을 가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겠는가? 해안이 비록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동호의 직필을 가지고 있어서 (허균이 찬술한) 비문에 대해 두 번 세 번 (수정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명대사가 입적한지) 31년이 되는 경진년(1640) 3월 모일에 삼가 쓴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은 사명문파의 나옹법통설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였지만, 뚜렷한 결말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나옹혜근이 평산처림의 분파라는 데에만 동의하고 그 이후의 법통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해안은 나옹법통설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기술함으로써 혜구의 주장을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해안이 비판한 나옹법통설의 순서는 나옹혜근 이전의 법맥이 순수한 임제종의 법맥이 아님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해안의 노력은 꽤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 같다. 이후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행장들과 비문들은 하나같이 태고법통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태고법통설이 최종적으로 불교계에 공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령 17세기 후반에 월저도안(月渚道安, 1638~1715)은 무학자초(無學自超)의 ‘종파도’를 중보(重補)한 〈불조종파지도〉를 편찬하면서 나옹혜근의 법맥에 무학자초만을 올리고, 태고보우의 법맥이 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1764년 사암채영(獅嵓采英)이 여러 문파의 견해를 수렴하여 편찬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에서도 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으로 이어지는 태고법통을 제시하였다.

17세기 초 편양언기와 그 문파가 왜 태고법통을 고집했는지는 여러 방면에서 고찰되었는데, 혜근이 임제종의 평산처림에게서 뿐만 아니라 인도 출신의 지공에게도 법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순수한 법맥이라고 보기 어려워 폐기되었다는 견해, 모호한 법맥을 바로잡기 위해 공론을 통해 확정했다고 보는 주장, 조선전기 불교계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해 등이 있다.
이러한 견해 가운데 분명한 점은 휴정의 제자들이 법통설로 논쟁을 벌이기 전에는 법통이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 말의 보우나 혜근도 인가를 받기 위해 원 나라에 갔을 뿐 법통을 중시하여 유학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법통을 강조하였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이는 휴정 대까지 이어졌던 전통적인 인식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법통이 강조되면서 태고법통설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태고법통의 공인은 곧 조선의 선이 임제종임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선사들이 중국 임제종의 법통 계승을 정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선교일치의 사상적 통합에 이어 법통의 단일화를 통한 종파의 통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불교는 단일한 교단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그 스승과 제자가 사자상승하면서 이어가는 문파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문파가 형성되어 그 계보가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병자호란에서 의승군을 이끌었던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과 그 제자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벽암각성의 스승인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역시 청허휴정과 마찬가지로 부용영관의 제자이므로 이 들 역시 태고법통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휴선수를 조사로 하는 부휴계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임진왜란 의승장 청허휴정의 문도들이 부휴계와 대비되는 청허계로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부휴계의 문파가 순천 송광사와 지리산 화엄사·쌍계사를 중심으로 성장해가던 즈음에 청허계는 휴정의 4대 제자를 중심으로 문파를 형성해갔다. 그 4대 문파는 사명유정(1544~1610), 정관일선(1533~1608), 소요태능(1562~1649), 편양언기(1581~1644)의 문파였다.

먼저 청허계의 4대 문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사명문파를 살펴보자. 사명유정은 15세 즈음에 직지사 신묵(信默)에게 출가하였으며, 18세(1561)에 선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재건된 승과(僧科)가 모두 다섯 차례 실시되었는데 그 중에 네 번째의 승과에 합격하였던 것이다. 유정은 어린 나이에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점차 문명(文名)으로 알려졌지만, 1565년 문정대비 사후에 벌어진 불교탄압으로 고승들이 유배되고 선교양종이 폐지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 후 30세(1573)에 직지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32세(1575)에 청허휴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휴정을 대신하여 의승군을 통솔하였다. 이런 이유로 유정은 당대에 이미 휴정의 적전으로 평가받았는데, 휴정도 〈선교결〉을 지어 ‘종사로서 모범이 되고 나의 법을 저버리지 말라’고 부촉하였다. 그리고 유정의 제자 송월응상(松月應祥, 1572~1645)은 부휴선수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며 1624년에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었지만 거절하였고, 송월응상의 전법제자인 허백명조(1593~1661)는 1627년 정묘호란 때 팔도승병대장으로 안주에서 4천여 의승군을 이끌었다. 이처럼 사명문파는 17세기 중기까지 불교계를 지도하는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혜구가 주도하였던 사명문파의 나옹법통설이 폐기되고 태고법통설이 공인되었으며 두드러진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정을 교종 승려로 보았던 당시의 시선도 사명문파의 쇠락을 촉진시켰던 것 같다. 1694년에 이천보(李天輔, 1698~1761)가 찬술한 〈양산통도사설송당연초대선사비문〉에서 유정은 교파이고 언기는 선파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비문의 주인공이며 편양문파인 설송연초(1616~1690)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당시의 인식이 그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정이 왜 교파로 인식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간화선 중심의 선종이 최고의 가치로 인식되던 시점에 교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명문파가 쇠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1768년 사명문파의 후손 혜심이 찬술한 《사명당근원록》 〈서문〉에서 “모든 융성한 문파의 대덕종사들이여! 쇠잔한 문파의 후예를 비웃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며 사명문파의 쇠락을 자인하였다.

두 번째 정관문파를 살펴보자. 정관일선은 행장이나 비문을 남기고 있지 않은데, 그의 제자인 임성충언(任性忠彥)의 〈임성당대사행장〉에 의하면, 선으로는 등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의 법맥을 이어받았고, 교로는 등계정심→정연법준→백하선운의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또 당대의 대강주로서 특히 법화경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주로 속리산과 덕유산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말년에는 덕유산 백련사에서 거주하다가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임성충언(1567~1638)과 운곡충휘(?~1613)가 뛰어났다. 이 두 사람은 부휴선수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적이 있으며 나중에 정관일선에게 와서 가르침을 받은 공통점이 있다. 임성충언은 속리산과 덕유산을 중심으로 일선의 가르침을 전수하는데 매진하였고, 운곡충휘는 해인사와 대둔사 등지를 유력하였다. 정관문파의 승려들은 대체로 호남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부휴계 및 소요문파와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경자수(無竟子秀, 1664~1737) 이후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18세기 이후는 문파의 활동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세 번째 소요문파를 살펴보자. 소요태능은 처음에 부휴선수에게서 수학하였고 나중에 휴정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직접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국가를 위해 기도하였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축(修築)에 공이 있어서 효종에게 혜감선사(慧鑑禪師)라 는 시호를 받았다. 말년에는 지리산 연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제자로는 해운경열(海運敬悅, 1580~1646)과 침굉현변(枕肱懸辯, 1616~1684)이 뛰어났다. 해운경열은 태능의 적전이었지만 태능보다 먼저 입적하였고 행장이나 비문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계보에서 대둔사 제12대 경사(經師)인 아암혜장(兒庵慧藏, 1772~1738)이 나와 경열의 비석을 세워 추숭하였다. 침굉현변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말년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장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 호암약휴(護岩若休, 1664~1738)가 유명하였다. 약휴는 1736년에 북한산성 팔도도총섭으로서 승역(僧役)의 폐해를 지적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756년(영조 32)에 의승입번제가 의승방번전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소요문파의 승려들은 호남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취여삼우(醉如三遇, 1622~1684), 화악문신(華岳文信, 1629~1707), 벽하대우(碧霞大愚, 1676~1763), 설봉회정(雪峰懷淨, 1677~1738)은 대둔사 12종사에 포함되었으며, 나암승제, 운담정일, 금주복혜, 랑암시연, 아암혜장은 12대 경사에 포함되었다.

-국립 순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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