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에서 법맥의 전승
—한국불교태고종의 조파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불교 전통은 대부분 조선시대 유풍(遺風)이다. 조선시대 이전에 있던 불교 전통 가운데 사라진 것도 있지만 문헌 부족으로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가령 고려시대 승려의 범주에 ‘유처승(有妻僧)’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조선 전기에 이 를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진척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사라진 고려시대 유풍도 있지만 고려시대에 없었던 전통이 조선시대에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풍도 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하나가 법통(法統)이다. 한국불교에서 법통이 중시된 것은 조선후기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법통이 중시되었다고 볼만한 문헌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를 주도했던 선사(禪師)들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법통을 잇고자 하였는데, 이때 주목된 승려가 고려 말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었다. 이들은 중국 임제종 승려로부터 인가(印可)를 받고 귀국하였고 그 문손(門孫)들이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 불교계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법통 가운데 결국 태고법통을 선택하였고, 그 이후 태고법통의 계승자를 자부한 문파(門派)들이 서로 경쟁하며 근대기까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또 한 번의 큰 변화과정을 겪는다. 불교 근대화를 내세우며 승려의 결혼이 장려되었던 일제강점기가 지나자 승려 결혼을 왜색불교(倭色佛敎)라고 포장하고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불교 포교를 위해 결혼했던 승려들의 치열한 문제의식은 온 데 간 데 없고, 한국불교 전통을 무너뜨린 주범인 것처럼 몰아갔다. 그리고 이승만은 그러한 불교계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불교사적 인식 위에 한국불교태고종에서 인식하는 태고법통설과 그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17세기 이후 법통설의 제기와 문파불교(門派佛敎)의 전개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2. 17세기 나옹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의 제기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는 건물과 불상·불화를 조성하는 외형적 재건을 해나가면서 동시에 정신적 구심점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법통 논쟁이 발생하였다. 본래 불교의 법통 의식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고승전(高僧傳)이 편찬되면서부터 발생하였고, 그 후 이러한 법통 의식이 유교에 영향을 주어 송나라 시대에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에서는 불교가 유교에 영향을 주었다기보다 송나라 유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유학의 도통론이 불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신분질서가 혼란해지자 양반들이 문벌을 강조하기 위해 17세기 이후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족보를 본격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경향도 불교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즉, 유학자들의 도통론과 족보편찬이 영향을 미치면서 17세기 불교계에 법통론이 부각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도통론과 족보편찬이 불교의 법통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17세기에 갑자기 부각된 불교계의 법통론은 당시 유가에서 도통론을 중시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법통 논쟁은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법맥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휴정은 삼노행적(三老行蹟)을 통해 자신의 스승이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이고, 또 영관의 스승이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이전의 법맥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런데 허균(許筠, 1569~1618)은 1612년에 쓴 《청허당집(淸虛堂集)》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도봉영소(道峰靈炤) 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종(法眼宗) 영명연수(永明延壽)의 법을 전수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에 돌아와 현풍을 크게 떨치며 말법세상을 교화하였다. 그리하여 조사서래(祖師西來)의 뜻이 비로소 선양되어 우리나라 승려들이 임제와 조동의 가풍을 이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가 선종에 끼친 공헌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국사의 정법안장이 도장신범에게 전해졌고, 그 뒤에 청량도국, 용문천은, 평산숭신, 묘향회해, 현감각조, 두류신수의 6세를 거쳐 보제나옹에게 전해졌다.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여러 선지식들을 널리 찾아 뵙고 두루 통달하여 우뚝하게 선림의 사표가 되었다. 그의 법을 전수한 자 중에 남봉수능이 적전이 되었고, 정심등계가 그 법을 이었으니, 그가 바로 벽송지엄(碧松智嚴)의 스승이다. 벽송은 부용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였는데, 부용의 도를 얻은 자 중에는 오직 청허 노사가 가장 걸출했다고 한다.

위 글에서 보듯이, 허균은 휴정의 법맥이 중국 법안종의 법을 전수받은 도봉영소로부터 비롯하여 나옹혜근(1320~1376)을 거쳐 벽송지엄의 제자 부용령관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도봉영소는 고려 광종대 국사를 지냈던 혜거(慧炬, 900?-974)를 가리킨다. 2017년에 서울 도봉산의 도봉서원 자리에서 〈혜거국사비〉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도봉서원은 조선 초까지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그 비문을 통해 도봉영소가 바로 혜거국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612년에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의 제자 혜구(惠球)의 요청을 받고 찬술한 〈합천해인 사사명당유정대사석장비문〉에서도 비슷한 법맥을 제시하였다.
오직 보조지눌(普照知訥)과 나옹혜근만이 황매산 홍인(弘忍)의 종지를 얻어 우뚝 선문의 종사가 되었으니, 쇠망치를 한번 휘두르자 만인이 모조리 쓰러지듯이 하였다. 그리하여 열반묘심과 정법안장이 우리나라에 은밀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보제대사 나옹혜근으로부터 5대를 전하여 부용령관에 이르렀는데 청허 노사가 입실제자로 칭해졌다. 서산대사 청허 노사는 혜관과 묘오의 경지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으니, 실로 당시의 임제요, 조동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훗날 청허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승가에서는 사명대사를 성대히 추대하며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을 만하다고 하였다.
보조지눌(1158~1210)과 나옹혜근이 고려 선문의 종사이고, 휴정은 혜근으로부터 6대의 적손이라고 하였다. 허균이 찬술한 위 두 글에 보이는 법맥은 당시 휴정의 제자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명유정과 그 문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청허휴정과도 친분이 있었고 그 제자 사명유정과도 오랜 세월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허균이 휴정과 유정의 법맥을 나옹혜근에게 연결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허균이 제시한 법맥을 정리해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도봉영소-도장신범-청량도국-룡문천은-평산숭신-묘향회해-현감각조–두류신수–나옹혜근- 봉수능– 등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

이러한 법맥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휴정이 고려 말 나옹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한 것이다. 나옹혜근은 1347년(충목왕 3) 원나라에 들어가 인도 출신의 지공(指空, 1235~1363) 의 문하에서 2년을 머무른 뒤 임제종 승려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처림 문하에서 6개월을 머문 후 다시 지공이 머물고 있던 연경으로 돌아갔다. 혜근은 연경에 머물 적에 원나라 황제로부터 금란가사와 비단 등을 하사받고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0년 만에 고려로 귀국하였다. 그러므로 惠 근은 인도 출신의 지공과 임제종 평산처림의 법을 이어받은 선사였다.
그런데 휴정의 제자 편앙언기(鞭羊彦機, 1581~1644)는 허균이 제시한 나옹법통설을 부정하고 태고법통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1625년에 쓴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와 저술 연도가 불분명한 〈청허당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종봉영당기〉: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이 중국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의 법을 이었으며, 그 법을 환암에게 전하였고, 환암은 소은에게 전하였으며, 소은은 정심에게 전하였고, 정심은 벽송에게 전하였으며, 벽송은 부용에게 전하였고, 부용은 등계에게 전하였으며, 등계는 종봉에게 전하였다.”
〈청허당행장〉: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이 중국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의 법을 이었으며, 그 법을 환암에게 전하였고, 환암은 구곡에게 전하였으며, 구곡은 등계정심에게 전하였고, 등계 정심은 벽송지엄에게 전하였으며, 벽송지엄은 부용영관에게 전하였고, 부용영관은 청허휴정에게 전하였다.”
언기는 허균이 고려 선사의 법맥이 조선의 선사에게로 이어졌다고 한 것과 달리, 고려 말에 중국 임제종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법을 이어받은 태고보우로부터 이어져 온 법맥이 휴정에게 이르렀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휴정은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것이다. 우선 언기가 위의 두 글에서 제시한 법맥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석옥청공–태고보우-환암–구곡–등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

언기가 제시한 법맥과 허균이 제시한 법맥을 비교해보면, 등계정심으로부터 청허휴정까지는 일치하지만, 그 위의 법맥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허균이 제시한 법맥을 나옹법통설이라 부르고, 언기가 제시한 법맥을 태고법통설이라 부른다.
나옹혜근과 태고보우의 공통점은 두 승려가 모두 중국 임제종의 조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혜근은 평산처림으로부터, 보우는 석옥청공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허균은 중국 임제종 법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고려 초 선사의 법맥이 나옹혜근을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하였지만, 그에 비해 언기는 중국 임제종의 조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태고보우 이후의 법맥만을 제시하였다. 아마도 언기는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받은 태고법통을 제시함으로써, 불교계의 구심점을 임제종 법통의 청허휴정에 두고자 했던 것 같다. 1630년에 간행한 《청허당집》 의 서문에서 이식(李植, 1584~1647)은 언기의 태고법통설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스님은 임제종의 적전이다. 원나라 석옥화상이 고려의 태고선사에게 법을 전하였고, 태고선사는 환암에게 전했고, 환암은 구곡에게 전했으며, 구곡은 정심에게 전했고, 정심은 지엄에게 전하였으며, 지음은 영관에게 전했고, 영관은 우리 스님에게 전했다.”

1612년 《청허당집》을 처음 간행할 때 허균의 서문이 실렸으나, 이때 다시 간행하면서 리식의 서문으로 교체하였던 것 같다. 이는 휴정의 법맥이 임제종 선사에게 인가를 받은 태고보우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천명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 순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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