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처님오신날에는 연등 법회를 보러 해인사 산내 암자인 M암자에 갔다. 이 암자는 주변 경치도 수려하고 아름답지만 그 무엇보다 해 질 무렵의 암자를 감싸고 도는 고즈넉하면서도 깊은 정적과 푸른 어스름이 일품이다.
암주 W스님은 속가 때 철학을 좋아하던 대학 학우인데 졸업 후 머리를 깎고 발심 출가했다. 우주의 원리나 인생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지는 그 분명한 이유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스님께서 특유의 발심으로 열혈 공부와 무서운 용맹정진으로 지금은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큰스님 반열에 올랐다. 나는 해마다 이 암자에 작은 연등을 켜왔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연등 법회에는 가급적이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노력해 왔다. 큰 딸애가 내가 보기에는 아직 부처님 공부나 신심이 약한 초보 불자이긴 하지만 이 W스님에게 불명을 받은 인연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이번 연등 법회에는 아내와 함께 가족이 참석했다.

해인사 큰절 입구를 지나쳐 관광단지 부락을 지나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M암자가 있다. 매번 이 길을 지나칠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1982년 대학 4년 때 가을 학술세미나라는 거창한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먹고 놀자는 일종의 졸업여행을 교수님들과 함께 이 해인사 사하촌인 관광단지에 온 적이 있다. 대학 생활 4년 내내 불성실했던 나는 당연히 학과의 졸업여행에도 불참 예정이었다. 지도교수님이 1960년대 한국 시단의 대표 시인 중의 한 분인 신동집 시인이었다. 지금 내가 시인이 된 것은 이분의 영향이 컸다. 영미시를 가르쳤는데 매우 훌륭한 수업을 하셨다.
그 교수님께서 “김 군도 이번에는 함께 가지. 시도 쓰는데….” 하시는 바람에 꼼짝없이 따라갔다. 초저녁 세미나를 대충 끝내고 밤새워 폭음과 가무로 보낸 새벽에 신동집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깨우셨다. 백련암에 성철이라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뵈러 가자고 하시면서, 이분을 만나려면 3천 배를 해야 한다는 말씀까지 덧붙였다.

이태 전 전라도 광주에서 신군부에게 많은 시민이 살상당한 ‘광주사태’(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 이후 광주민주화운동)가 일어났다. 국민은 분노했고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은 정면으로 신군부를 비판했다. 그런 때 불교계 지도자인 성철 스님은 그 유명한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발표했다.
역시 그 무렵 내가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던 문학평론가 Y교수님께서 스님의 그 법어에 대해 “이런 엄중한 시국에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스님이 전두환을 비판해야지 무슨 개☓같은 소리냐”면서 격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곁에서 들었다. 평소 언행이 신중하고 점잖은 분의 입에서 과격한 소리가 나와서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잠결에 그 스님을 만나러 가지는 소리를 듣고 그 일을 떠올리면서 나는 잠이나 더 자겠다면서 함께 가자고 채근하는 친구를 외면했다. 그 후 대학을 마치고 교사를 거쳐 지방 신문사 문화부 데스크를 맡고 있을 때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셨고 다비식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취재 차량과 사진기자를 붙여주었지만 나는 후배 기자를 대신 보냈는데 그 기자는 하필 기독교 열신자라서 “부장님이 가시지 않고….” 하면서 입을 툭 내민 채 취재한 적이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무슨 인연이었는지 나는 성철 스님이 철조망을 쳐 놓고 공부했다는 대구 팔공산 성전암과 스님 생가에 세워진 경남 산청 겁외사에도 몇 차례 가보고, 제자 스님과 따님인 불필 스님이 엮은 스님의 어록이나 일화를 꽤 읽었다. 스님의 말씀 가운데 내 가슴을 치는 것들은 ‘중한테 속지 말어’라는 것과 공부 제대로 하지 않는 스님들을 부처를 팔아먹는 ‘도적놈’이라고 질타하는 등, 자신을 낮추고 가난과 검소를 가르치는 말씀들이 어떤 어려운 법문보다 공감과 큰 울림으로 남았다.

이번 부처님 오신 날 M암자에 오가면서도 40여 년 전의 일화를 다시 생각했다. 그간 불교 경전도 읽고 큰스님들의 행적도 제법 좇아봤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삼천배’의 참뜻을 아둔한 내 머리는 여전히 알 듯 말 듯하다. 아직 내가 삼천배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큰스님이나 선지식이 도달했다는 그 정신세계의 정체나 높이가 여전히 궁금하다.

-시인ㆍ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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