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 18. 방장에게 육조단경을 배우다

얼었던 냇가의 물이 풀렸고, 골짜기마다 나뭇가지에 신록이 돋았다. 보허 스님에게 화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 같았다. 자연은 사계의 변화에 따라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부는 바람에 매화가 떨어졌다. 방장스님은 마당에 쌓인 매화를 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보허 스님에게 3조 승찬 대사의 법맥이 4조 도신 대사에게 계승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열네 살의 도신 스님은 승찬 대사를 뵙고 물었다.“스승님, 제게 자비를 베풀어 해탈의 법을 알려주십시오.”“누가 그대를 결박했는가?”“아무도 저를 결박하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굳이 해탈을 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승찬 대사의 말을 듣는 순간 도신 스님은 해탈의 길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찬 대사의 법을 계승한 도신 스님은 세월이 흘러 대중을 이끌고 강주의 대림사로 향했다. 당시 도신 스님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수행법을 역설했다.

보허 스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방장 스님, 일행삼매가 무엇입니까?”
방장스님이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은 뒤 대답했다.
“한적한 곳에서 일념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가 나타난다. 이를 일러 부처를 보는 것(見佛)이라고 한다. 곳곳에 불보살님이 계시지만 미욱한 중생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방장스님의 말을 듣고서 보허 스님은 일념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워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보리라고 다짐했다. 보허 스님은 산야에 꽃이 피고 지는 내내 부처님 명호를 외웠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송진 타는 여름날, 방장스님이 보허 스님에게 4조 도신 스님으로부터 5조 홍인 스님에게 법이 계승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도신 스님은 황매현에서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 어린이를 만났다. 도신 스님이 어린이에게 물었다.“성(姓)이 무엇이냐?”
어린이가 멀뚱멀뚱 도신 스님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성은 있으나 드문 성입니다. 불성(佛性)입니다.”“그렇다면 네 성은 없다는 말이냐?”“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이 어린이가 바로 5조 홍인 스님이었다. 도신 스님은 대중에 에워싸여 “일체법이 다 해탈”이라는 말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도신 스님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내용을 담은 ‘오문설(五門說)’을 계승해 홍인 스님은 ‘일상관(日想觀)’이라는 수행관을 확립했다.

보허 스님은 방장 스님에게 일상관의 본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방장스님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홍인 대사는 《수심요론》에서 ‘멀리 허공 저편의 시야가 다하는 곳에 있는 一이라는 글자를 바라보라’고 했느니라. 一이 무엇인고? 一은 문자로서의 一만은 아닐 것이다. 가로로 길게 뻗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이니. 그 지평선 내지는 수평선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이니. 일승으로서의 부처를 나타내는 것일 터. 지는 해가 장엄하게 만들어내는 장엄한 낙조야말로 온전한 해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허 스님은 방장스님의 말을 듣고서 마음속에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울긋불긋 산야에 단풍이 물든 가을에 방장스님은 보허 스님에게 5조 홍인 스님의 법맥이 6조 혜능 대사에게 계승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삽화=유영수 화백.
삽화=유영수 화백.

 

홍인 스님의 당번이 날린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홍인 스님은 법맥을 이을 동량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눈이 가는 것은 신수(神秀) 아사리였다. 신수가 홍인의 문하로 들어온 것은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을 쌓은 뒤였다.그러던 중 혜능(惠能) 스님이 신수를 찾아왔다. 광동성 출신인 혜능 스님은 빈한한 농가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시장에 나무땔거리를 내다 파는 글도 볼 줄 모르는 무지렁이였다.혜능 스님이 홍인 스님에게 절을 올렸다. 홍인 스님이 묻고 혜능 스님이 답했다.“너는 어디서 온 누구냐?”“영남에서 온 혜능이라고 합니다.”“무엇을 구하고자 왔는가?”“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영남의 오랑캐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남쪽 북쪽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불성(佛性)에 남북이 있겠습니까?”홍인 스님은 혜능 스님이 자신의 법을 이을 법기임을 알았으나 주변에 제자들이 있는 까닭에 “너는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고 말했다.그러던 어느 날, 홍인 스님이 사중의 스님들을 불러 모았다.“스스로 갖춘 자성(自性)의 지혜를 밝혀 게송을 하나씩 지어 오너라. 게송을 보고 깨달은 자가 있으면 육대 조사로 부촉하겠다.”당시 홍인 스님이 주석했던 오조사에는 1,000여 명의 대중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선뜻 먼저 게송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중은 교수사인 신수 스님이 홍인 스님의 법을 이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수 스님은 여러 날 고심하다가 회랑 벽에 이런 게송을 써 놓았다.몸은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홍인 스님은 회령 벽에 쓰인 게송을 보고 누가 지은 것인지를 대번 알아챘다. 홍인 스님은 신수 스님을 부른 뒤 이렇게 말했다.“이 게송은 문 앞에 이르렀으나 문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다. 가서 좀 더 생각하여 다시 게송을 지어 오너라.”신수 스님은 끝내 게송을 짓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접한 혜능 행자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신수 스님의 게송 옆에 자신의 게송을 적게 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다.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홍인 스님은 이 게송을 보고서 단박에 혜능 행자가 지은 것임을 알았다. 이튿날, 홍인 스님은 방앗간으로 가서 허리에 돌을 메고 방아를 찧는 혜능 행자에게 말했다.“쌀은 다 찧었느냐?”“쌀 찧은 지는 오래이나 아직 낱알 고를 키질을 못했습니다.”홍인 스님이 주장자로 방아를 세 번 치고는 조사당으로 돌아갔다. 삼경에 찾아오라는 신호였다. 홍인 스님이 지시한 대로 혜능 행자는 조사당을 찾았다. 홍인 스님이 《금강경》을 읽어 주었다.“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대목에 이르러 혜능 행자는 단박에 깨달았다. 일자무식 혜능 행자는 8개월 만에 돈오하였다. 선의 밀지(密旨)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보허 스님은 혜능 대사의 일화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보허 스님은 ‘가난한 집안의 일자무식 혜능 스님이 깨달음을 이뤘는데 나라고 못하겠느냐’라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폭설이 내리고 멀리서 승냥이 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겨울밤 내내 보허 스님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탐독했다.
보허 스님이 보기에 《육조단경》은 세 가지 점에서 의의가 컸다. 첫째, 혜능 대사가 부처님 이래 전수되어 온 심인(心印)의 계승자임을 밝혔고, 둘째, 자성(自性)을 떠난 부처는 없음을 역설하였고, 셋째, 자성의 수행법이 돈오(頓悟)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보허 스님은 《육조단경》을 읽다가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하고, 무작(無作)을 본(本)으로 하며, 진공(眞空)을 체(體)로 하고,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한다.” 는 대목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보허 스님은 방장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하루는 방장 스님이 인자한 표정을 지은 뒤 이렇게 말했다.
“지눌(知訥) 스님도 《육조단경》을 종지로 삼았느니라. 자신이 머물던 산의 이름도 조계산으로 바꾸었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하실 당시 지눌 스님은 《육조단경》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많은 조사님들이 조사어록인 《육조단경》을 다른 경전보다 존숭(尊崇)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선불교의 역사는 장강(長江)의 물줄기를 타고 대하(大河)를 이뤘다. 불법은 일부의 것이 아니라 모든 대중의 것이다. ‘세간을 여의고 보리를 찾음은 토끼뿔을 구하는 것과 같으리’라는 혜능 대사의 <모양 없는 노래(無相頌)>의 한 구절을 숙고해 보거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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