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의 출가기 여전히 감동적

 

꼭꼭 묻어둔 이야기-나의 스승 일엽 스님

월송 스님 구술

조민기 정리

민족사

값 18,000월

걸출한 여장부인가? 스캔들 메이커인가?
일엽 스님의 친모 이마대 여사는 외동딸 김원주를 ‘열 아들 안 부러운 대장부’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마대 여사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딸을 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김원주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차별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김원주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빼어난 감수성과 문학 재능을 갖춘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 후 <신여성> 창간, ‘신여성 1세대’라는 ‘걸출한 여걸’로 사회적 이슈를 주도하며 문인으로, 여성해방운동가로 활약했다.

선구자로서 찬사도 있었으나 김원주가 ‘열 남자 안 부러운 대장부’다운 모습을 과시한 분야는 연애였다. 젊은 날, 김원주는 가십과 루머,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치며 감탄과 비난을 몰고 다녔다. 특히 이혼과 <신여자>의 폐간 이후 자유연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일과 연애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김원주가 만공이라는 큰 스승을 만나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또 스승과 다른 차원에서 김원주를 불교로 이끌어준 백성욱 박사도 일엽에게 있어서 큰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일엽은 백성욱 박사와의 이별 후, 재혼과 이혼을 거쳐 마침내 출가의 길로 들어서 만공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수덕사로 입산한다. 만공 스님은 일엽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인가와 전법게를 내리며 당부했다.
“백련처럼 성품이 바뀐 후에 세상에 나서라.”
오랜 세월,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일엽은 스승의 뜻에 따라 주저 없이 절필하였고 승가 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일엽 스님이 30년 동안 놓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 견성암의 ‘입승(入繩)’이었다.

만공 스님이 열반하고 난 뒤 스님은 하늘같고 바람 같은 스승을 마음껏 기리는 글을 썼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과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던 일엽 스님의 글이 발표되자 다시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제자 월송 스님은 일엽 스님을 보필하며 스승의 글이 세상에 반듯하게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했다.

일엽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온갖 소문들이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돌아다녔다. 소문의 대부분은 생전에 버젓이 서점을 차지한 채 불티나게 팔리던 가짜 자서전류의 이야기들이었다. 스승이 입적한 후 묵묵히 진실을 지키고 있었던 월송 스님과 환희대 문중은 소문이 아니라 꼭꼭 묻어두었던 스승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대한 해명이 아닌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수행자 일엽 스님을 최초로 재조명한 것이 이번에 발간한 이 책이다.
월송 스님은 일엽 스님 문중 제자 중 최초의 대학생이자 동국대학교에 승복을 입고 다닌 최초의 스님이다.

이 책은 소문과 가십의 주인공이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당시 세간의 시선, 편견, 모멸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어떻게 극복해서 주변을 감화시킬 수 있는지 그 생생한 목격담이라 할 수 있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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