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 16-보림사에서 새로이 공부를 시작하다

말을 마치고 광지 스님은 추천서를 건넸다. 추천사는 전라도 장흥에 소재한 보림사 방장스님께 보내는 편지였다. 보허 스님은 은사가 건네는 두 손을 받은 뒤 하직인사를 올렸다. 삼배를 올리고 나니 보허 스님은 오랜 기간 은사 스님을 뵙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보허 스님의 속내를 읽었는지 광지 스님이 입을 뗐다.
“너는 대기대용한 법기이니 이런 작은 사찰에 있을 게 아니라 대찰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참새는 기껏해야 집 앞 나뭇가지에 앉아 울지만 매는 드넓은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냇물은 강을 거쳐서 바다에 닿는 법이다. 더 멀리 나아가야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광지 스님은 이어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었다.

도의 국사는 선덕여왕 5년(784)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백장회해 선사에게서 법요를 배운 뒤 헌덕왕 13년 귀국하였다. 도의 국사는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 들어가 40여 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용맹정진하다가 입적하였다. 도의 국사의 법손인 보조 체징 선사가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가람인 바로 보림사였다.

은사스님께 인사를 올린 뒤 보허 스님은 곧바로 바랑을 챙겼다. 회암사에서 보림사까지는 족히 사나흘은 걸릴 거리였다.
보허 스님은 보림사에 갈 동안 하루에 한 끼만 탁발해 먹었다. 잠도 농가의 헛간에서 신세를 지거나 야산의 동굴에서 자야 했다. 밥 먹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보허 스님은 충청도 홍주의 한 마을에 탁발을 하러 갔다가 수십 칸이나 하는 집을 보았다. 짐작컨대 홍주에서 손꼽히는 권문세가의 집이었다. 그런데 비단 옷을 입은 사내가 두 팔이 오랏줄에 묶인 채 끌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필시 큰 죄를 저지른 게 분명했다. 나졸들에게 끌려가는 사내의 뒤를 누르스름한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면서 따랐다. 사내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야. 집에 들어가거라.”
아마도 개의 이름이 보리인 듯싶었다. 개는 주인이 마을을 호령하던 권문세가에서 나졸들에게 끌려가는 대역죄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개에게는 여전히 주인일 따름이었다.

이틀 동안 쉼 없이 걸은 끝에 보허 스님은 전라도의 한 어촌마을에 닿았다. 해가 저문 뒤여서 보허 스님은 한 초가집에 들어가 신세를 져야 했다. 때마침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빈한한 살림의 노인은 자신이 먹을 것도 넉넉지 않을 텐데 보허 스님에게 밥을 나눠주었다. 저녁을 들면서 노인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전쟁 때 자식들을 모두 잃고 이태 전 아내마저도 돌림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외롭고 가난한 노인을 지키는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 노인의 개 이름은 보리였다. 보허 스님은 “개 이름이 왜 보리냐?”고 물었고, 노인은 누런 털 빛깔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개는 노인의 뒤만 쫓아다니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노인은 개에게 먹다 남은 조밥과 반찬 찌꺼기를 주었고 개는 개밥그릇을 샅샅이 핥아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노인은 손바닥으로 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개는 감사의 인사로 하듯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려니 보허 스님은 불제자의 덕목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안으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밖으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였다. 공교롭게도 권문세가의 개와 빈한한 촌부의 개는 이름이 같았다. 두 마리의 보리는 주인을 지극하게 섬길 줄 알았다. 개들에게는 주인의 신분이 높고 낮음과 상관이 없었다. 주인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분별도 하지 않는 두 마리의 개를 보고서 보허 스님은 깨달음이란 분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게도 노인은 보허 스님에게 자신의 방에서 함께 자자고 했다. 온종일 걸어왔던 터라 바닥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먼동이 트기 전 보허 스님이 길을 나서려고 하자 노인이 사립문까지 따라 나왔다. 노인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인기척을 느낀 개가 툇마루 아래에서 나와서 꼬리를 흔들어댔다. 노인이 마지막 인사말을 건넸다.
“스님, 성불하셔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구해주시구려.”
보허 스님은 주름진 얼굴에 저승꽃이 핀 노인에게 말없이 합장 반배했다. 길을 걷는 내내 성불이라는 말이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림사는 회암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대찰이었다. 수행하는 납자들이 100여 명이 넘었다. 보허 스님은 염화실에 가서 방장스님께 삼배를 올린 뒤 은사스님이 주신 추천서를 건넸다. 방장스님이 추천서를 다 읽은 뒤 물었다.
“보허 수좌는 회암사에서 무엇을 공부했는고?”
“은사스님으로부터 무자 공안을 받아서 정진하였습니다.”
방장스님은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은 뒤 다시 물었다.
“그래서 해답은 얻었는가?”
“보림사로 오는 길에서 보니 권문세가의 개도, 촌부의 개도 똑같았습니다.”
“어떻게 같았는고?”
“털 빛깔은 누르스름하고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댔습니다. 두 놈 다 이름이 보리였습니다.”
방장스님은 목젖이 보이게 호탕하게 웃은 뒤 입을 뗐다.
“매일 저녁마다 방장실로 오게.”
이튿날부터 방장스님은 선에 대해 알려주었고, 덕분에 보허 스님은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 혜능대사까지 법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배울 수 있었다.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문자 너머의 문자이자 경전 밖의 또 다른 경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달마 대사는 은사인 반야다라에게서 ‘꽃이 피면 세계가 일어남이로다’라는 전법게를 받았다.

삽화=유영수 화백.
삽화=유영수 화백.

 

중국 땅에 다다른 달마 대사는 양 무제(武帝)를 만났다. 당시 중국 도처에 ‘일체가 곧 부처’라는 《능가경(楞伽經)》 의 정신이 그 싹을 틔우고 있었던 데다가 먼 나라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두 번째로 깨달은 성인이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은 전란에 시달려온 중국 사람들에게는 평화에의 비원이 담긴 것이었다.양 무제는 자신이 승려의 가사를 걸치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설했고, 오경의주(五經義注) 2백 권과 그 밖의 논술을 지어낸 공적을 쌓고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제위에 오른 무제이지만 선무후문(先武後文)을 펼쳤다. 양 무제는 인도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에 비견할 만했다.첫 대면한 자리에서 양 무제는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나는 수많은 절을 짓고 수많은 학승들을 절에 살게 했습니다. 또한 나는 불법을 펴기 위해 많은 대학을 세웠습니다. 양나라를 불법의 보배로 가득 채웠습니다. 내 공덕은 어느 만큼이나 되겠습니까?”달마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폐하의 공덕은 없소. 공덕이 없으니 공덕에 대한 보상도 있을 리 없소. 지옥에나 안 떨어지면 다행일 것이오.”
당황한 양 무제가 다시 물었다.“내가 왜 지옥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소.”“석가모니 부처님은 불법을 전하면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았소. 세상의 유위(有爲)의 법으로는 지혜의 가르침을 얻을 수 없소.”

달마대사와 양 무제의 일화를 들려준 뒤 방장스님은 보허 스님에게 물었다.
“달마 대사는 왜 양무제가 공덕이 없다고 했는가?”
“해와 달은 이 세상 어디고 안 비추는 곳이 없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담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본체는 허공처럼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옳거니.”
보허 스님의 말을 듣자마자 방장스님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쳤다.

-소설가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