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이고 산업화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나라 전체가 몹시 가난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회가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았고 더구나 시골 마을은 치안이 채 자리가 잡히기 전이었다.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로 100여 호의 농가가 거의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마을에서 기와집은 초등학교 건물과 지서(지금의 파출소) 정도였고 부잣집 한두 집이 지붕에 기와를 얹은 집에서 살았다. 자연부락 특유의 좁은 골목길이 마치 뱀의 몸뚱이처럼 구불구불 초가집 사이로 이어져 마을을 엮었고 골목이 굽어지는 모퉁이에는 향나무가 한두 그루 곁에 서 있는 공동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40년대 일제식민지가 끝나갈 무렵 동네 앞을 저 멀리 비껴 중앙선철도가 개통되고 마을 한 복판을 가로질러 5번 국도라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철로가 개통되자 기차역이 생겼고 기차역을 중심으로 장터가 형성돼 잇따라 닷새장이 생겨났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인 그곳은 추운 겨울이 되면 눈이 많이 내려 초가지붕을 수북하게 덮었고 고드름이 초가집 처마에 마치 발처럼 주렁주렁 달려서 우리 꼬마들은 그 고드름을 꺾어서 칼싸움을 하기도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호롱불 밑의 겨울밤은 특히 길고 추웠다.

매일 밤 잠들기 위해 누워 있으면 골목 저 끝에서부터 “패 주소, 패 주소오오~” 하는 굵은 장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울바람이 휭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불거나 초저녁부터 눈이 내리는 날도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동네 골목에서 들리는 그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졸리는 눈을 억지로 뜨고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손위 누이들이 오늘도 패 달란다. 나가서 부지깽이로 때려 줄까? 하는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밤마다 마을 뒷산에 올라서서 마을을 향해 외치거나 골목길을 다니면 패(牌)를 달라는 소리는 몽둥이로 때려 달라는 말이 아니라 어느 집에선가 숨겨놓은 패를 달라는 간청이었다. 이 패라는 것은 옛날 마패처럼 나무로 만든 작은 목조각이었다. 이것을 동네의 어느 집에선가 숨겨두고 소임이라 불리는 동네 일꾼이 그 패를 찾으러 동네 전체를 헤매고 다니면 삼경(三更) 넘어서 쯤 그 패를 숨겨두었던 집에서 소임에게 그 패를 주고 패를 찾은 소임은 그날 밤 임무를 끝내고 자기 집으로 귀가했다. 이 소임에게는 일한 삯으로 여름 보리철에는 보리를, 가을 추수철에는 나락을 마을 사람들이 모곡이라는 이름으로 모아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옛날에는 동네 마다 자체적으로 도둑을 막고 방범활동을 했다. 우리 마을의 소임은 집안 당숙이었다. 이 어른은 일제 말기 일본 북해도의 탄광인가 노역장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다리를 다쳐 평소 절뚝거리며 다녔다. 노동력이 많이 훼손된 것이다.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 말하자면 마을 전체가 이 분의 생계를 보살핀 셈이다. 부처님 용어로는 약한 사람에게 보시(布施)를 한 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딸이 휴가를 받아 해외여행을 한다고 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홋카이도에 눈 구경 간다고 했다. 한자식 발음으로 북해도(北海道)이다. 염치불구하고 아내와 따라나섰다.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계획도시 눈 덮인 삿포로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징용 온 아재가 여기서 노역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눈의 고장이라는 비에이(美暎)라는 마치 우리 고향 마을 같은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일행에게 주어진 한 시간의 짧은 점심시간을 아껴 동네구경을 하다가 뒷골목에서 일본 사찰을 만났다. 관음선사(觀音禪寺)라는 간판이 눈에 파묻힌 채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으로 아재와 같은 징용자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합장을 했다. 이 지구상에서 전쟁은 언제 없어지려는가….

-시인,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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