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은 지난 10월 21일 제49기 합동득도 수계산림에서 사미 30명, 사미니 8명 총 38명의 새 승려를 배출했다. 이날 수계의식에서 행자들은 연비의식을 갖고 정식 사미 사미니 자격을 얻게 되자 한국불교태고종 전통 홍가사를 봉대하고 수지했다. 우리 종단의 정식 승려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이들 출가자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사표(師表)로 역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초심이다.

초심은 나를 잡아주는 버팀목이자 강인하게 이끌어주는 채찍이다. 이런 저런 유혹과 나태로부터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메시지이자 일상적 삶 속에서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신약(信藥)이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내 삶을 빛나게 회향시킬 수 있는 ‘리모콘’이기도 하다. 초심은 그래서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하는 지계와도 같다. 다만 출가 수행자가 파계를 범했을 경우 대중의 질책과 그에 따른 벌칙이 주어지는 것과는 달라서 언제든 좌절과 포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초심을 잃고 변절과 굴곡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초심을 잃는다면 언제든 위기의 삶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초심을 잃었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변칙과 타협을 용서했다는 말이 되고 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는 상황을 부른다.

불교에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다. 신라의 의상 스님이 《화엄경》의 뜻을 요약한 ‘법성게’란 글에 나오는 이 말은 처음 불도에 마음을 내디뎠을 때 그 마음이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뜻이다. 처음 믿고 발심[서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말이다.

부처님에게 초심은 중생들에게 놓여진 생로병사의 문제를 푸는데 있었다. 그래서 왕자의 신분마저 포기하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의 대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이 초심을 놓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부처님은 왕자의 신분으로 ‘빛의 세계’에 사셨다. 매일같이 궁녀들의 가무가 펼쳐지는 빛 속에서 젊은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사신 분이 출가를 단행하여 저 깊은 숲 속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그 칠흑같은 어둠만이 짙게 깔려있는 숲 속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온갖 독충과 뱀과 날짐승들이 있었을 그 곳에서 맨 몸으로 날을 지샌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부처님을 그 어둠의 세계에 이르러 수행하게 했을까. 그것이 초심이었다. 부처님으로 하여금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하게 만든 그것이 바로 초심이었던 것이다. 이 초심이 위대한 이유는 부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들을 생로병사의 유전으로부터 구제해야 겠다는 대승의 서원이 깃들어 있어서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초심정신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초심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가져가는 사람의 인생은 성공하고 삶이 빛난다. 반대로 초심을 놓은 채 타협과 변절로 삶을 꾸리는 이들은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되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불교계가 초심을 잃고 외형과 허세에 빠질 때 사회로부터 크게 외면받는 사례는 적지 않았다. 과거 핍박과 외압에 굴복하여 왕실의 보호에만 전격 의존함으로써 타락한 불교는 제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서 이러한 모습은 과연 없는지 자성해 볼 일이다. 말은 끝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는 경구를 가슴에 새긴다면 초심이 갖는 변화의 힘을, 그 위력을 실감할 것이다. 특히 올해 동안거 결제일을 앞두고 종단의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정진에 들어간 종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이들의 초심이 한국불교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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