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조선 후기 후불도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ㆍ 〈김천 직지사 석가여래삼불회도〉를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또한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화성 용주사 감로왕도〉・〈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각각 지정 예고했다.

 

△ 국보 지정 예고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陜川 海印寺 靈山會上圖)〉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조선시대).
합천 해인사 영산회상도(조선시대).


화면 하단의 화기(畵記)를 통해 1729년(조선 영조 5)이라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 의겸(義謙)을 비롯, 여성(汝性), 행종(幸宗), 민희(敏熙), 말인(抹仁) 등 화승(畵僧)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제작 책임자 격인 의겸 스님은 붓의 신선인 ‘호선(毫仙)’이라고 기록했다.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중앙의 석가여래를 크게 부각시키고 나머지 도상들은 하단에서부터 상단으로 갈수록 작게 그려 상승감을 표현했다. 조선 후기 불화이지만 제자들의 얼굴 표현, 그리고 세부 문양에서는 조선 전기 불화의 전통도 확인할 수 있다.

불·보살의 얼굴과 신체를 금으로 칠하고 불·보살을 포함해 모든 존상의 복식 문양을 가는 금선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는 등 화려함과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

 

〈김천 직지사 석가여래삼불회도(金泉 直指寺 釋迦如來三佛會圖)〉
조선 후기 후불도이다. 중앙의 영산회상도, 좌측의 약사여래설법도, 우측의 아미타여래설법도 3폭으로 구성됐다. 현존 삼불회도 중 3폭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세관(世冠)을 비롯,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의 화승들이 1744년(조선 영조 20) 완성해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공간적 삼불회도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불화이다. 장대한 크기에 수많은 등장인물을 섬세하고 필치가 장중하다. 3폭 모두 사방 테두리 부분에 《조상경(造像經)》에 근거한 원형의 범자문 진언을 배치하여 상징성을 부여한 점도 주목된다.

세 폭의 하단에는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의 정보가 담긴 화기가 있다. 이를 통해 직지사 화승 외에 인근 사찰의 화승들이 다수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명의 화승이 공동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지만 유기적인 분업과 협업을 통해 세 폭 모두 한 사람이 그린 듯 통일감이 느껴진다. 또한 화기에는 화승의 역할에 따라 차례를 구분하고 화승의 이름 뒤에는 소속 사찰이 함께 기록돼 있어 화승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 보물 지정 예고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螺鈿菊唐草文箱)〉

나전국화넝쿨상자(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상자(고려시대).

 


2023년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이 일본에서 환수한 유물이다. 뚜껑과 몸체, 안쪽에 공간을 분리하는 속상자로 구성됐다. 침엽수 계통의 나무로 만든 백골 위에 천을 바르고 그 위에 골회(骨灰)를 입혀 자개를 붙힌 후 여러 번 옻칠하여 마감했다.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 제작 방식인 목심저피법(木心紵皮法)으로 제작됐다.

표면에는 총 770개의 국화넝쿨무늬를 배치됐다. 부수적으로 마엽무늬(麻葉文, 원을 중심으로 한 수평, 수직, 사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무늬), 귀갑무늬(龜甲文, 거북의 등딱지 모양을 띤 무늬), 연주무늬(連珠文, 점이나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하여 만든 무늬)를 사용했다.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국화넝쿨무늬는 얇게 갈아낸 자개를 오려내어 붙인 줄음질 기법으로 표현했다. 부속무늬로 사용된 마엽무늬와 귀갑무늬는 자개를 가늘게 잘라내 끊어가며 무늬를 표현하는 끊음질 기법으로 표현했다.

넝쿨무늬의 줄기는 황동선을 꼬아 사용하는 등 나전을 비롯한 고려 후기의 우수한 공예 기술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전 고유의 빛깔이 잘 남아 있으며 문양의 정교함이 돋보인다는 점에서도 높은 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를 지녔다.

 

〈화성 용주사 감로왕도(華城 龍珠寺 甘露王圖)〉
화기를 통해 1790년(조선 정조 14)이라는 제작 연대와 상겸(尙兼), 홍민(弘旻), 성윤(性玧), 유홍(宥弘), 법성(法性) 등 제작 화승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이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조성했다. 또한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는 사찰인 원찰(願刹)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이곳에서 수륙재(水陸齋)를 개최했다. 이 수륙재에 사용될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상단에는 불·보살의 강림을, 하단에는 음식을 베푸는 시식(施食) 의식과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배치하면서 천도 의식을 통해 불·보살의 구제를 받아 망자가 천도하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표현했다.

화면 상단에는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했다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목련존자(木連尊者)를 그렸다. 이는 효(孝) 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표현이다. 무엇보다 화면 하단에 그려진 죽음의 장면 중에는 18세기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여러 장면과 당시 유행했던 소설 삽화에 영향을 받은 표현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에 미친 일반 회화의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화성 용주사 감로왕도는 화면의 안정된 구도나 세부 표현 기법에서 완성도가 높다. 18세기 후반 불화에 수용된 일반 회화의 양상만이 아니라 불교의 구제신앙과 유교의 효사상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정조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襄陽 禪林院址 出土 金銅菩薩立像)〉
2015년 강원도 양양군 선림원지의 승방터(승려들이 거주하는 곳)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된 작품이다.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된 선림원은 통일기 신라 선종(禪宗)의 요람이다.

이 작품은 광배와 대좌까지 온전히 갖춘 희귀한 사례이다. 광배를 포함한 높이가 66.7cm로,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발굴품 중에는 가장 큰 보살상이다.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도금 상태로 볼 때 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몰된 후 1,100여 년이 지나 원래 봉안 장소에서 그대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배와 대좌 장식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도금이 거의 벗겨지지 않아 상태가 양호하다.

보살상, 광배, 대좌, 영락 심지어 정병도 각각 별도로 만들어 탈부착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머리카락은 남색 안료로 칠하고 얼굴의 눈썹과 눈, 콧망울, 수염, 머리카락과 이마를 경계 짓는 발제선 등을 먹으로 그려 넣었다. 또한 보살상의 얼굴에서 보이는 도드라진 윗입술 표현과 입체적인 옷주름, 천의와 낙액(絡腋) 등은 9세기 보살상의 우수한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여러 경전에 들어 있는 참회의 방법과 내용 등을 일정한 체계로 엮은 《자비도량참법》을 후대에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간행되어 조선시대까지 많이 전파되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은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김수온이 쓴 발문(跋文)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찍기 위한 목판을 1474년(조선 성종 5) 세조 비 정희왕후가 돌아가신 세종과 소헌왕후, 세조와 아들 의경왕(후일 덕종), 예종, 성종 비 공혜왕후 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81년(성종 12)에 인쇄하며 적은 발문을 통해 예종 계비 안순왕후가 양조모(養祖母)인 신숙화(辛叔和)의 처 김씨의 영가천도를 위해 펴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이 발원하여 제작을 주도한 왕실 판본이다. 간행과 인출 시기 및 목적까지 명확해서 더욱 가치가 있다. 현재 이 판본의 다른 불완전본이 보물로 이미 지정된 바 있는데, 이번 지정 예고 대상은 10권 5책의 완질본이고 보존 상태가 우수한 선본이므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신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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