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년 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어제(御製)에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중략)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라고 밝혔다.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에 28자가 창제됐고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된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로 수양대군은 1447년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기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후 세조 대(代)에 만들어진 간경도감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등의 각종 불경언해서를 간행했다.

불교의식을 행할 때, ‘진언’은 외우기도 하고 범자로 쓴 불・보살의 종자(種字)를 관상하기도 한다. ‘진언’에 사용된 ‘범자’는 불교의식과 수행에서 꼭 필요한 문자였고, 의식에 필요한 각종 ‘다라니’ 등을 모은 ‘진언집’ 은 조선 시대 내내 여러 번 간행됐다.

조선 시대 《진언집》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전라도 광주 무등산 인근의 안심사에서 판각된 것이다. 이 《진언집》은 당시 불교에서 널리 독송되던 각종 진언을 모아 한글음-한자어-실담범자의 순서로 판각했다. 그러나 우리말과 전혀 다른 범어와 범자를 표준발음으로 발음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범음을 잊어 그 표준발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범음집》을 간행한다는 서문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조선 후기 혜언(慧彦) 스님(1783~1841)은 1777년 만연사본 《진언집》을 간행하며, 간행 목적이 ‘다라니를 정확하게 수정하여 본래의 범어와 달라진 음을 바로 잡고 보완하기 위한 데 있다’라고 밝혔다.

혜언 스님은 ‘범자오십자모실담장’의 범어 50자모를 한글에 대응시키고, ‘실담자-한자음과 사성(四聲)-한글음’으로 표기하고, 모음은 단음과 장음・이중모음을 구분했으며, 소리의 장단에 맞추어 명확하게 소리 낼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을 더 하여 범례를 만들었다. 한글과 한자, 범자를 같이 표기하여 발음의 장단까지 정확하게 음성으로 발음할 수 있게 표준화하는 데 목표를 뒀다. 즉, 정확한 소리로 진언을 송주하고, 올바르게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불보살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중생이 기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의식의 사회적 확산의 원력이 《진언집》 간행에 있어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한자로 전승되던 문자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이 땅으로 전승되며 범자-한자어로 전해지던 각종 진언을 우리 고유의 음운 법칙에 따라 그 발음을 ‘우리 말’로 표기할 수 있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연유로 조선 시대 널리 간행된 《진언집》들은 항상 그 첫머리에 한글을 배우고 익히기 쉽도록 ‘언문자모’라는 것을 배치했다.

원래 ‘언문자모’는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이 지은 조선 시대 어린이를 위한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1527)에 처음 등장한다. 《훈몽자회》의 ‘언문자모’는 이후 《진언집》, 《밀교집》 등 불교에서 간행된 ‘진언집’ 류에도 자주 나타나는데, 이러한 진언집들은 책의 앞부분에 언문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하고,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 범자의 정확한 발음을 도왔다.

그야말로, ‘나랏말이 천축과 달라 범서(梵書)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인 시대가 ‘한글 창제’로 새롭게 열렸다.

범자 진언의 한글 발음 병기는 불교의 저변 확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민중이 널리 신앙하던 각종 진언집 및 미타 사상 관련 불교서적의 발행이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 불교는 ‘한글’과 함께 대중에게 어떤 ‘사상’과 ‘문화’, 그리고 ‘상생’과 ‘공존’을 모색하며 실천하고 있을까? 한글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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