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 5.

소설암의 경내를 거닐며 나목들을 바라볼 때마다 태고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 떠올랐다. 한 스님이 찾아와서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운문 선사는 “금풍이 불면 온 몸이 드러나지.”라고 대답했다.

태고 선사가 왕사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민왕은 홍주(洪州)에 느티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선사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홍주는 목으로 승격됐다. 제법 세월이 흘렀으니 느티나무의 둥치도 굵어졌으리라. 태고 선사는 주석처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지은 〈고림(古林)〉을 읊조렸다.

가지도 없고 잎도 없는 이 나무
봄바람 불어 그 뿌리를 흔든다.
푸르지도 희지도 않은 빛깔의
꽃이 피어도 흔적이 없다.

신록이 돋고 녹음이 우거지는 사이 나무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혔을 것이다. 하지만 고엽이 떨어진 나무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렇게 자신을 치장했던 모든 허위의식을 버린 뒤에야 비로소 나무는 본지풍광(本地風光), 즉,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天然) 그대로의 심성(心性)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틀 전부터 태고 선사는 죽은 물론이고 물조차도 마시지 않았다. 깨끗하게 속을 비우고 떠나려는 준비였다. 몇몇 상좌들이 문안인사를 와서는 “미음이라도 드시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태고 선사는 살포시 웃어보였을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태고 선사의 소식을 들은 군수가 말을 타고서 찾아왔다. 군수의 양손에는 노환(老患)에 좋은 약들이 들려 있었다. 태고 선사는 군수에게 국사의 도장을 건넸다.
“왕께 전해주십시오.”
군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군수가 떠나자 우왕에게 편지를 썼다.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잘 다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태고 선사는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내일 유시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라”고 지시한 뒤 임종게를 읊었다.

인생명약수포공(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년춘몽중(八十餘年春夢中)
임종여금방피대(臨終如今放皮帒)
일륜홍일하서봉(一輪紅日下西峰)

사람 목숨이란 물거품과 같아서
팔십 여년을 봄꿈 속에 지냈구나.
목숨이 다하여 오늘 허울을 벗어놓고 가려하니
한 바퀴 붉은 해가 서쪽 봉우리로 잠기는구나.

한 상좌가 소리 내어 울면서 “은사스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태고 선사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읊조렸으나, 상좌들이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본래 생멸이 없으니 내왕(來往)도 없는 것이나, 굳이 내가 가는 곳을 묻는다면 얼음 속에서 불길이 솟고 무쇠나무에서 꽃이 피는 태곳적 자리라고 답할 수밖에.”
제자들을 물리고 태고 선사는 좌선에 들었다.
 

삽화=유영수 화백
삽화=유영수 화백

 

충숙왕 6년(1319) 회암사 광지 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삭발염의하는 13세의 사미승이 보였다. 소년 사미승은 청년 비구승이 되었다. 19세가 되자 비구승은 가지산문 총림으로 가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공안을 참구하였다. 비구승은 선사가 되었다. 선풍을 익힌 뒤 선사는 원나라로 가서 석옥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았다. 석옥 선사는 법제자에게 가사와 주장자를 주었다. 선사는 귀국한 뒤 임제종의 고승 고담 선사와도 교유하기도 했다. 선사는 왕사가 되었다. “내가 왕이 되면 선사를 왕사로 모시겠다.”고 약속한 대로 공민왕은 선사를 왕사로 책봉했고, 왕사는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백장청규의 실현을 통해 불교계를 쇄신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사는 금고(禁錮)의 죄인이 되었고, 불교계 쇄신은 미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몸은 속리산에 갇혀 있었으나, 마음은 허공같이 뚜렷하여서 모자랄 것도 없고 남을 것도 없었다.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금고의 죄인은 국사가 되었다.

태고 선사는 점멸(點滅)하듯 떠오르는 환영을 떨쳐버리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찰나가 지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태고 선사가 몸 안에서 ‘한 물건’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평생 동안 찾아다닌 한 물건이었다. 한 물건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그 성전일구(聲前一句)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마하 가섭 존자도 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팎이 없는 한 물건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여(眞如),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佛性),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심지(心地) 등 경전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한 물건은 기실 누구나 구족하고 있었다. 임제선사가 자신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장애의 대상이 부처님이나 조사님일지라도 모두 죽이라고 한 것도 한 물건은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그대들은 무엇을 구하려고 발바닥이 닳도록 제방을 쫓아다니느냐? 구할 부처도 없고 이를 도도 없으며 얻을 법도 없다. 설령 밖에서 모양 있는 부처를 구한다고 해도 그 부처는 그대들과는 닮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들이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그 마음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니,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다운 도는 바탕이 없으며 본래 법은 모양이 없다. 이 셋은 혼연하여 하나일 뿐이다.”
임제 선사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태고 선사는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생사(生死)의 업(業)을 넘어선 태곳적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하여 선사는 일없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었다.

그날 저녁 태고 선사는 꼿꼿하게 앉은 자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하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니, 이는 마치 용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의 부고를 듣고서 우왕은 몹시 슬퍼한 뒤 소설암에 향을 보냈다.
소설암 방장실 앞에서 다비식을 봉행하였는데, 스님의 법체가 불에 타오르는 동안 밤하늘에는 광명이 길게 뻗쳤다.
몇몇 사람은 그 광명이 붉은 해가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선사의 사리 100여 과를 수습했는데, 정수리에서 나온 사리들은 별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선사의 사리 100여 과를 받은 우왕은 선사를 공경하는 마음에 시호(諡號)를 원증(圓證)이라고 내리고,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는 탑을 세웠다.
선사의 문도와 장로(長老)들은 돌을 다듬어 종(鐘)을 만들고 사리를 넣어 네 사암에 간직하였는데, 그 네 사암은 양산사(陽山寺), 사나사(舍那寺), 청송사(靑松寺), 태고암(太古庵)이다.
이후 소설산에도 탑을 세웠다. 비문에는 환암(幻庵), 고저(古樗), 철봉(哲峯) 화상 등 고승, 비구니 묘안(妙安), 최영, 이성계 등 거사 20명 등이 이름이 올랐다.
선사의 비문들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 양촌 권근,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이색은 태고집 서문에서 “화상은 중국 석옥 화상에게 법을 이어 받은 임제의 18대 손이다. 연경에서 개당하여서 그 명성이 천자를 움직였고, 선조의 스승이 되매 그 덕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입혀졌다. 30여 년 동안 조용히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한 일은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도(道)란 하늘과 땅을 덮었고 형상과 이름을 뛰어넘는 것이거늘 거기에 무슨 문자나 언어가 있겠는가.”라고 선사의 행장을 기리면서 찬탄했다.

비록 선사의 법체는 오간 데 없으나, 사람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일깨워준 선사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해 있으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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