㉖ 유일한 비구니 선지식 사자빈신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가 수나국의 가릉가림 성에 도착한 선재 동자와 보리는 더운 날씨에 나무 밑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하였다. 마침 ‘햇빛 동산’이 있어 ‘보름달’이라는 이름의 큰 나무는 잎이 너무 많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칠보로 된 연못은 금모래가 깔려 있었다. 부드럽고 은빛 찬란한 물 위로 연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울파라 연꽃, 분타리카 연꽃, 파드마 연꽃, 쿠무다 연꽃들이었다.
보리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선재에게 물었다.
“오빠, 수나국은 어떤 뜻을 가진 나라야?”
“으응! 수나라는 것은 용맹하다는 뜻이야. 가릉가는 투쟁을 해서 이긴다는 뜻이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럼 사자빈신 스님은?”
선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뵙고 보살도를 여쭤봐야 해. 사자빈신 비구니는 53 선지식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 선지식으로서 단정한 몸과 고요한 위엄을 갖추고 두려움이 없기가 사자 왕과 같다고 해.”
보리가 사자 왕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두려움이 없는 사자는 맹수인데 비구니 스님이 어떻게 맹수가 돼?”
“꼭 맹수라기보다…. 하하 참, 너는 똑똑한 것 같은데 맹추로구나!”
“뭐, 맹추? 내가 왜 맹추야! 몰라서 물어본 것 뿐인데….”
약이 올라 얼굴이 빨개진 보리를 달래며 선재가 말했다.
“그러니까 사자빈신 비구니 스님은 그만큼 당당하고 겁이 없으며 지혜롭고 광명이 넓다는 거야.”
보리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자빈신 비구니는 그때 승광 왕이 보시한 햇빛 동산의 보배나무 아래 사자좌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큰 코끼리와 같고, 또한 몸매는 단정하며 눈은 맑고 청정하여 마음의 때가 다 씻기는 것 같았다. 선재는 햇빛 동산의 숲과 사자좌, 그리고 지혜의 법문을 들으려 모여든 군중들을 보고 ‘나는 마땅히 오른쪽으로 백 천 바퀴를 돌리라’ 마음먹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며 사자빈신을 비추었다. 선재와 보리는 사자빈신 비구니 앞에 합장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거룩하신 이여, 저에게 보살의 도를 말씀해 주소서.”
“그런데 잠깐, 스님!”
선재 동자가 말하는 틈새를 비집고 보리가 말했다.
“저는 보리라고 하는데요. 선재오빠를 따라 53 선지식인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여태 만난 선지식인님들 중에, 비구니 스님은 처음이에요. 덕운 스님, 해운 스님, 선주 스님들은 다 비구 스님이었거든요. 남자 스님!”
그러자 선재 동자가 당황하여 보리를 막았다.
“야, 야. 너,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그래?”
“아니, 그러니까, 여자인데, 어떻게 스님이 되셨냐구요?”
그에 사자빈신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오오오, 보기보다 똑똑한 아가씨네. 나도 너처럼 소녀일 때가 있었지. 특히 엄마랑 아주 친해서 밤낮으로 같이 있었단다.”
“그래서요?”
“내 어머니는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지혜롭고 자비스럽기는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고 깊었지. 또한 부처님을 아주 좋아해서 늘 부처님같이 살기를 바라셨어요.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사과를 깎아 내게 주려고 하셨는데 아주 앳된 모습의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서 우리 보고 ‘손들어!’ 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벌벌 떨며 엄마 뒤에 숨었는데, 어머니는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으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손은 네가 들어!’ 하시는 거야. 당연히 사과 깎던 칼을 강도에게 슬그머니 겨누셨지.”
보리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물었다.
“엄마야! 그래서요?”
사자빈신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강도가 되레 깜짝 놀라 칼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지. 알고 보니까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게 되었던 거야. 어머니는 강도를 안아주시면서 집에 있던 모든 돈을 털어 강도에게 주셨단다.”
선재 동자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스님에게 합장하며 선 채로 절을 하였다.
“나는 그때 알았지, 어떠한 순간에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림이 없이 사자처럼 우뚝 서서 넓은 눈으로 세상을 자비롭게 보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
보리가 환희심에 차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신 어머님이시네요, 스님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나는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길을 따라 가려고 노력할 뿐이지, 내가 어머니를 본받아 스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어느 날 배고픈 거지가 더러운 옷을 입고 밥 좀 달라고 왔단다. 어머님은 그 거지를 따뜻한 물에 깨끗이 씻기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정성껏 대해 주셨지. 그게 소문이 나면서 집 앞에는 거지들이 서로 싸우고 내가 먼저라며 욕심 부리며 줄을 섰지만 어머님은 항상 차별 없이 잘 대해주셨지. 그러자, 거지들은 차츰 서로 싸우지도 욕심도 부리지 않고, 온순한 양처럼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따르더니 다들 부처님 제자가 되었어. 그게 바로 ‘분별없는 자비심’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자라면서 나도 거지들을 따라 좀 더 지혜로운 자비를 베풀기 위해 스님이 되었단다. 언제나 어머니가 하신 행동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53 선지식 안에 들게 되었지!”
그 말에 선재 동자가 다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자빈신 비구니는 존경하는 눈빛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분별없는 자비심은 분별없는 지혜에서 생기는 거란다.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오면 나는 반야바라밀다를 말해 주고, 모든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라는 분별을 내지 않았으니 지혜의 눈으로 보며, 모든 말을 들어도 말이라는 분별을 내지 않으니 마음에 집착이 없고, 모든 생각들도 사실은 모두가 허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잡된 생각을 안 하고 욕심을 버리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부처님 공양으로 반야바라밀다의 깨우침을 넓은 지혜를 통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있단다.”
보리가 몸을 돌려 사자빈신의 품에 안기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역시 하나밖에 없는 비구니 선지식님이시네요. 정말 만나 뵙게 되어서 기뻐요. 스님과 스님 어머님의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선재 동자는 보리가 몇 번씩이나 대단하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보리도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게 잘한 일이다 싶으니 부처님의 지혜안이야말로 대단하시다고 느껴졌다.
사자빈신 비구니가 보리와 선재 동자를 안아주며 말했다.
“선남자여! 나는 분별없는 자비심으로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지혜안을 가졌지만 많은 보살 마하살들이 잠깐 동안에 모든 부처님 계신 데 나아가며, 자신의 몸속에서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일은, 내가 어떻게 알며 그 공덕의 행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선남자여,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험난이다. 그 나라에 보장엄이란 성이 있는데 그 성중에 바수밀다라는 여인이 살고 있다. 선재는 그를 찾아가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느냐고 물으라.”
“예, 그러하겠습니다.”
선재 동자는 그의 발에 예배드리고 무수히 돌고 우러르면서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면서 여태 만났던 선지식인들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덕운 스님, 둘째는 해운 스님, 셋째는 선주 스님, 넷째 미가 장자, 다섯째 해탈 장자, 여섯째 해당 스님, 일곱째 휴사녀, 여덟째 비목구사 선인, 아홉째 승열 바라문, 열 번째 자행 동녀, 열 한번째 선견 스님, 열 두번째 자재주 동자, 열 세번째 구족 우바이, 열 네번째 명지 거사, 열 다섯번째 법보계 장자, 열 여섯번째 보안 장자, 열 일곱번째 무염 족왕, 열 여덟번째 대광 왕, 열 아홉번째 부동 우바이, 스무 번째 변행 외도, 스물 한번째 우바라화 장자, 스물 두번째 바시라 선사, 스물 세번째 무상승 장자, 스물 네번째 사자빈신 비구니…. 스물 네 분의 선지식을 만나 뵈었으니 보람되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스물아홉 분을 더 만나야 하니까, 마음을 다잡고 좀 더 열심히 보살도를 닦아야겠다는 생각에 배에 힘이 빵빵하게 들어가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 입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