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고 3.

태고 선사는 하루 한 끼, 그것도 죽을 몇 숟가락씩만 들다 보니 언젠가부터 귀가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참선에 들었는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엷은 것으로 봐서 말은 사하촌(寺下村)의 인가나 산의 초입 오솔길을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손님이 찾아오겠거니 싶어서 태고 선사는 참선을 멈추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설암에 내리는 소설(小雪)이었다. 소설도 쌓이고 쌓이면 대설(大雪)이 되는 것이니 산야의 나목(裸木)들은 문익점 대사성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로 지은 두툼한 동복(冬服)을 걸치고 있었다. 눈은 내려서 쌓이면서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물론이고 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스적이는 대숲소리며 휘휘 늘어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낙락장송의 나뭇가지 소리며 청산의 모든 아프고 서러운 소리들을 지우고 있었다.
태고 선사는 며칠 전 무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른 스님의 문집도 후학들이 준비하고 있습니까?”
태고 선사는 자신이 살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후대에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단군부터 시작된 우리민족의 역사를 남겼고, 나옹 스님은 침향처럼 깊은 향기를 전하는 선시(禪詩)들을 남겼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태고 선사는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이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으나 입 밖에 내뱉지 않고 도로 삼켰다.

달마대사의 법을 네 번째로 이어 받은 도신(道信) 스님이 우두산에서 토굴을 짓고 정진하는 법융 스님을 만나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법융 스님이 서슴없이 “마음을 찾는다”고 대답하자 도신 선사가 반문한 말이 ‘관시하인 심시하물’이었다. 마음을 찾는 자는 누구이고, 그 마음은 어떤 물건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찾는 자의 마음과 찾고 있는 대상인 마음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물은 것이기도 했다. 도신 스님의 말을 듣고서야 법융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자 찾고 있는 마음이 다름 아닌 자기 마음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태고 선사는 자신이 얻은 것도, 남길 것도 마음 밖에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생각이 밝아지면 가없는 천상으로 오르지만, 한 생각이 어두워지면 밑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니, 마음은 이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 뿐만 아니라 천상도(天上道), 수라도(修羅道), 악도(惡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지옥도(地獄道)도 지어내고, 심지어 불보살님도 빚어내는 것이리라.

달마대사는 “마음. 마음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는 자리도 없다.”고 했다. 열반의 즐거움도, 윤회의 고통도 한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신라의 원효 성사도 마음밖에 특별한 진리가 없다고 했다. 원효 스님의 말대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까닭에 고요해야 할 바다에 파도가 이는 것이리라.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는, 크다고 하면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작다고 하면 하늘도 포용하는, 밖으로 펼치면 법계를 감싸고도 남으나 안으로 거두면 실오라기만큼도 허용치 않는 깊고 고요한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마음은 안에서 찾으면 뚜렷하고 호젓이 밝아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나,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고 코로도 맡을 수 없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한 물건’일 따름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대지가 울리는 게 느껴졌다. 경내 안으로 도포를 입고 유건(儒巾)을 머리에 쓴 유생이 조랑말을 타고 오는 게 보였다. 유생은 아름드리 굵은 소나무에 말을 묶어 놓더니 태고 선사가 서 있는 것으로 걸어왔다. 태고 선사는 오랜 기간 산사에 은둔하다 보니 격식에 맞게 차려 입은 유생이 낯설게 보였다.
유생은 땅바닥에 엎드려 태고 선사에게 삼배를 했다. 선 채로 합장반배를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유생은 정도전이었다.
“이게 누구요? 삼봉(三峰)이 아닙니까?”

삽화=유영수 화백
삽화=유영수 화백

 

태고 선사는 풍문을 통해서 우왕 원년에 정도전이 나주로 귀양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는 이인임, 경복흥 등 친원파 구세력과 이색, 정몽주, 정돈 등 친명파 신셰력이 반목하고 있었다. 전의부령(典儀副令)을 맡고 있던 정도전은 다른 신흥사대부들과 함께 도당(都堂)에 “만일 원나라 사신을 맞는다면 다음에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친원파 구세력은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고 명했다. 이에 격분한 정도전은 경복흥을 찾아가서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아니면 오라를 씌어서 명나라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도전의 행동을 항명으로 판단한 도당은 정도전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태고 선사는 정도전을 주석처로 안내했다. 차를 내려서 찻잔에 따르면서 태고 선사가 물었다.
“삼봉이 나주에 유배를 갔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도전이 찻잔을 비운 뒤 입을 뗐다.
“나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양지가 종편거처(從便居處)로 바뀌어서 고향인 영주로 갔으나, 왜구가 수시로 창궐해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습니다. 이후 삼각산 아래 삼봉재를 열고 후학을 양성하려고 했으나, 한 재상이 헐어버리는 바람에 훈장 노릇도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세 차례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옛 벗들의 편지조차 끊긴 상황이니 앞으로는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길까 합니다.”
“하수상한 세월이니 상봉처럼 올곧은 나무들만 비바람에 몸살을 앓는구려.”
태고 선사는 차를 들면서 정도전이 자신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정도전은 구가세족에 맞서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충선왕은 즉위년에 하교를 통해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가문을 발표했다. 대대로 재상을 배출한 가문에는 고려 개국에 일조한 문벌 귀족과 무신의 난 이후 득세한 가문도 있었지만, 원나라와 친분이 두터웠던 부원(附元) 세력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구가세족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장악함으로써 나라의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도평의사사의 전신인 도병마사는 군사 문제만 다루는 관청이었으나, 원나라의 지시로 도평의사사로 개편됨에 따라 국사 전반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커졌다.
층선왕이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에서 귀국했을 때 백성들이 몰려와서 각기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권세가가 제 땅을 빼앗아 관리에게 억울함으로 호소했으나 관리는 법대로 처리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양민이었으나 권세가가 강제로 노비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을 들은 충선왕은 즉위 후 교서를 통해 백성들이 살아가는 자산인 토지를 사유화하고 양인을 강제로 천민으로 만드는 권세가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충선왕이 원나라로 다시 불려감에 따라서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재오추칠(宰五樞七)의 원칙에 따라 재신(宰臣) 5명, 추신(樞臣) 7명 등 구성원이 12명을 넘지 않았던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뒤 구성원들이 점차 늘어났다. 우왕 대에 와서는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이 80여 명에 달하였는데, 구성원의 대부분은 구가세족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만큼 구가세족들은 많은 토지를 지녔지만 부역의 의무는 지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현릉(공민왕)으로서는 구가세족과의 반목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태고 선사는 자연스럽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판사(判事)를 맡았던 신돈이 떠올랐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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