㉔ 바시라 선사여! 깃발을 높이 들어라.
선재가 보리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동안, 저 멀리 누각성이 보였다. 성으로 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높았다가 낮아지고, 평탄하다가 험하고, 길이 깨끗한 곳도 있지만 더러운 곳도 있고, 곧게 쭉 뻗은 길 다음은, 굽이굽이 굽은 길이 나왔다. 선재는 길을 걸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처음 보는 이런 길을 보여준다는 것은, 비단 걸어가는 도로만 그런 게 아니고, 선지식을 찾아가는 그 일이 그렇고, 사람들의 삶의 하루하루가 그럴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는 마땅히 저 바시라 선사와 친해져서 모든 보살의 도를 성취해야겠다. 왜냐하면 선지식에게서 모든 착한 법을 얻고, 선지식의 힘을 의지하여 일체 지혜의 길을 얻어야 하니까….’
또 선지식은 만나기 어렵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하루 빨리 보살도를 성취할 수 있도록 다짐하며 걸어갔다.
그때 뱃사공 바시라 선사는 성문 밖 바닷가 언덕 위에 있으면서 백 천의 장사꾼들과 대중에게 둘러싸여서 큰 바다가 지닌 법을 말하면서, 부처님의 공덕 바다를 방편으로 일러주고 있었다. 선재 동자가 보리와 함께 그의 발에 절하며 오른 쪽으로 세 번 돈 뒤, 합장하고 말했다.
“거룩하신 이여, 보살도를 잘 가르쳐 주신다 하니 바라건대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오.”
뱃사공 바시라 선사가 대답했다.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선남자여, 그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도다. 선남자여, 나는 이 성의 빈궁한 중생들을 보고, 그들을 이익 되게 하려고 여러 가지 고행을 닦으며, 그들의 소원을 모두 만족시키는데, 먼저 세상 물건을 주어 그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사만이 가능한 일인지라, 일반 백성들은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보통 사람에게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듯이 비록 진리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리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물건을 먼저 소원하는 만큼 주면, 다시 돌아와서 부처님께 받았던 경제적 은혜를 재보시로 다시 갚게 되는 거야.”
그가 말하는 사이, 선재와 보리는 물론 많은 장사꾼들과 대중들이 배에 올라탔다. 배가 천천히 움직일 무렵, 잘생긴 청년이 바시라에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아저씨! 바시라 아저씨…. 저 좀 태워주세요.”
그가 말했다.
“어? 누구지? 나는 기억이 안 나는 데,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저예요. 라크샤, 십육 년 전에…. 아빠랑.”“아빠?”
바시라 선사가 묻자, 라크샤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빠는 돌아가셔서 같이 오지 못하고…. 유품만 싣고 배를 탔지요.”
그제야 선사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 물었다.
“아! 그때, 돈이 없어 아빠 옷과 신발을 끌어안고 울고 있던 그 꼬맹이가 이렇게 컸다고?”
라크샤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땐, 정말 선사님 아니었으면 살 수가 없었지요. 배도 공짜로 태워주시고, 밥 사 먹으라고 돈도 주시고, 아는 친척에게 말해 살 집도 구해주시고…. 진짜 진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에 보답하려고 돌아왔지요. 근데 혹시 저의 새엄마 소식은 알고 계시는가요?”
“응? 새엄마? ”
“네, 화사수츠 새엄마요.”
바시라 선사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아! 그 화사수츠…. 꽃뱀! 널 무지하게 구박하고, 밥도 잘 안 주던 심술쟁이.”
“네…. 다 알고 계셨군요.”“그럼,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반면에 너의 아빠는 사람이 좋았는데….”
라크샤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참았던 울음이 꺽꺽거리며 터져버렸다. 보리가 놀라서 라크샤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여 준다.
“맞아요. 흑흑, 아빠는 새엄마가 밥을 안 주면, 몰래 주먹밥을 싸서 내 방에 넣어주곤 하셨어요.”
선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왜 ’금강산이 식후경‘인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리의 깨달음이 생기는지 알 것 같았다.
화사수츠는 라크샤네 집이 부자인 것을 알고, 계획적으로 도우미 아줌마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라크샤 엄마가 갑자기 전염병으로 죽어버리자, 라크샤를 자기 아들처럼 잘 보살피며, 처음에는 비드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잘해주더니 점점 라크샤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라크샤의 아빠 비드얌은, 화사수츠가 라크샤를 잘 돌보고 키워주겠다는 말에 속아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비드얌이 조금이라도 아들을 챙기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 날이 갈수록 질투심에 못 이겨 그녀는 바로 밥상을 던지고 부셔 버렸다. 그리고 둘 다 밥을 굶겼다. 두 부자는 화사수츠의 학대에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자기 몫의 밥을 덜어 아들에게 주며 눈물짓고 슬퍼하던 비드얌은, 결국 몹쓸병에 결려 얼마 못살게 되자, 라크샤의 손을 잡고 다짐하듯 말했다.
“라크샤, 착한 내 아들! 아빠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너를 고아로 만들게 되었구나. 내가 만약 죽게 되면 배를 타고 가서 내 고향에다 나를 묻어 다오. 네 엄마도 거기 묻혔으니, 우리가 비록 죽었다 할지라도 계속 너를 돌봐 줄 거야. 나는 네가 잘 자라기를 기도하면서, 커가는 모습을 저승에서도 지켜보고 싶어. 정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볼게. 그리고 진짜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너를 두고 먼저 가는 이 죄를 어떻게 해야 너에게 용서를 받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 네가 정말 정말 잘 자라서 착한 사람이 되기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빌 거야. 저승에서도 물을 떠 놓고 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리고 얼마 후 비드얌이 죽자, 화사수츠는 비드얌을 바다에 버리고 라크샤를 내쫓았다. 아빠의 시신만이라도 묻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내가 너희 부자에게 공들인 것을 생각하면, 너는 그냥 나가는 게 맞아.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나도 여기 집을 팔고 다른 데로 이사할 갈 거니까….”
라크샤는 입었던 옷과, 돌아가시기 전 입었던 아빠의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만 끌어안은 채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 라크샤가 뱃삯이 없어 울고 있을 때, 바시라 선사가 그를 도와주었다. 라크샤가 아홉 살 되던 해였다.
“그 못된 화사수츠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도망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하던데.”
바시라 선사가 말하자 라크샤가 물었다.
“벼락을 어떻게 맞았을까요?”
선사가 대답했다.
“아마도 소문에 의하면, 하루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려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 나무 밑에 서 있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네, 그랬군요….”
라크샤가 잠잠히 있으려니까 배 위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보리가 갑자기 물었다.
“그럼, 그럼, 돈 보따리는 어떻게 됐나요? 십육 년이 지났는데?”
바시라 선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는데 성질이 급하네. 네가 보리냐?”
선재와 보리가 다시 선사에게 합장하며 절을 하였다.
“화사수츠가 죽고 나자 그녀의 가족이 돈을 돌려달라고 내게 찾아왔지. 내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이 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하고…. 사람들이 라크샤가 돌아 올 때 까지 잘 보관 했으면 좋겠다 하여 내가 보관하고 있었지. 저기 누각성 높은 길 옆에 항아리를 묻어서 잘 보관했지. 하하하!”
라크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돌아왔지만, 저는 그 돈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가 번 돈도 아니고…. 선사님께서 옛날에도 그랬듯이 불쌍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써주세요. 저 역시, 선사님의 도움을 크게 받았잖아요. 저는 여기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의 글공부를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제가 받은 은혜를 다시 돌려주려고요.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재보시라고 한데요. 다시 돌아올 재! 선사님이 그때 말씀해 주셨지요.”
그말에 보리가 두 팔을 벌려 웃으며 소리 질렀다 .
“우와아! 라크샤 오빠! 최고다.”
선재 동자가 급히 보리의 입을 막았다.
“야, 보리. 조용히 해! 네가 언제 봤다고 라크샤 오빠야?”
보리가 말했다.
“언제 보기는? 지금 같이 있으면 오빠지! 그렇죠? 라크샤 오빠, 진짜 멋있어요. 오빠! 짱, 짱, 짱!”
선재 동자가 라크샤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자, 라크샤는 보리가 정말 귀엽고 착하게 생겼다며 웃어준다.
그때, 선사가 말했다.
“라크샤의 말처럼 나는 이 성의 바닷가에 있으면서 보살들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당기의 행을 깨끗하게 닦는 수행을 했었다.”“당기의 행이 뭔가요?”
보리의 물음에 선사가 대답했다.
“나는 이 커다란 배에 당기를 세우고 모든 중생이 지혜의 바다에서 높은 광명을 찾는 데 실수가 없도록 도와주고 있지만, 모두가 평등해지고 바다를 잘 다스려 악한 일을 없애서 선한 바다를 만드는 일은 내가 알지 못하니 선재 동자는 남쪽 즐거운 성에 무상승 장자를 찾아가 보살도의 공덕행에 관해서 물어보아라.”
그러자 다시 보리가 선재에게 물었다.
“그래서 당기가 뭐냐고?”
선재가 보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당기, 당에 다는 깃발. 신령한 곳에 다는 깃발이야. 뱃머리에도 달아.”
“아! 그럼. 해적선 같은 데에도 다는 깃발?”
“머? 해적선? 푸하하하.”
보리의 말에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선재도 따라 웃으며 중얼거린다.
“크크크, 해적선….”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 입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