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 21.
何名摩詞 摩詞者 是大心量廣大 猶如虛空
莫定心座 卽落無記1) 空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2)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어찌하여 ‘마하’라 말하는가, ‘마하’라는 것은 큰마음이며 크기가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 같음이다. 마음자리로 정하려 하지 말라 즉각 무기에 빠진다.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 산하대지 일체 초목을 포함하며 선인 악인 선법 악법, 천당 지옥도 전부 공함 중에 있는 것이다.
‘막정심정 즉락무기(莫定心座 卽落無記)’, 이 부분을 보통 ‘마음을 고요히 하려 하지 말라 즉시 무기공에 빠진다.’로 번역한다. 이것은 전후 문장의 흐름으로 보자면 맥락적으로 어색한 번역이 된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혜능이 의도하는 취지를 고려해서 보자면, ‘허공, 공’을 설명하더라도 그 개념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즉 ‘막정심정’의 뜻은 자신의 마음자리에 개념을 붙들고 있는 ‘곳(자리)’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런 마음의 자리를 허용하게 되면 ‘공’을 직접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관념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라고 규정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무기공’에 빠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혜능의 설법은 지속적으로 행(行)을 유도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世人性空 亦復如是 性含萬法是大 萬法盡是自姓見
一切人及非人 惡知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由如虛空 名之爲大 此是摩詞行
세상 사람들의 성품도 공하여 또한 이와 같다. 본 성품은 만법을 포함하기에 ‘대(大)’라고 한다. 만법은 그대로 자성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람, 내지 사람 아닌 것. 선지식 악지식, 선법, 악법도 단지 모두 버리려고만 하지 않으면 집착에 물들지 않는다. 이렇기에 허공과 같은 것이니 이름하길 ‘대(大)’라 한다. 이래서 ‘마하 행’이다.
허공을 설명하면서 사람의 성품도 그와 같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청중들이 현재 마음 씀을 비유하는 여러 가지 것들의 개념에 머물지 말고 자신의 성품을 알아차림을 하게 하는 법문이다. ‘저런 무궁무진한 허공이 나의 성품과 같다고?’, 이런 의문이 일어나면 자기의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혜능의 법문은 개념을 설명하더라도 청중들이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마음챙김’할 수 있도록 경각심을 고조 시켜준다. 그래서 ‘명지위대 차시마하행(名之爲大 此是摩詞行)’, 즉 ‘이름하길(:名之爲)’처럼 ‘명’을 반복하고 또한 ‘마하(摩詞)는 사실 추상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마하행(摩詞行)’이라고 ‘행(行)’을 강조하고 있다. 도대체 ‘마하 행’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행하는데 있어서 크게 행하는 것인가? 그런 ‘큰’ 행이 별도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빠지고 있는지 알아차림 하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강조해도 인간의 인지심리는 개념화시키는 것이 일반적 특성이다. 그렇게 외부의 대상을 개념화해 놓고 이해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작용을 작금에 법을 전하고자 하는 분들은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迷人口念 智者心又有名 人空心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心量 大不行是少
莫口空設 不修此行 非我弟子
미혹한 이는 읊고 기억하려고만 한다. 지혜로운 이는 ‘마음’ 또한 이름(개념)에만 있는 것임을 안다. 사람은 마음이 공한 상태를 헤아릴 수 없다. 이름 붙이길 ‘크다[:大].’이다. 이것 역시 마음의 크기로는 측량할 수 없다. ‘크다[:大].’을 행하지 않으니 작아지는 것이다. 입으로 공을 설하지 마라, 수행 없이 이런 행을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중생은 외우고 기억하는 일을 잘한다. 하지만 그런 이가 ‘미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그 읊조리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이름]들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이를 아는 자는 이름에 집착하거나 개념에서 진실을 찾는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마음의 상상력은 무한대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 또한 착각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 안에 서만 상상이 가능하다.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단지 기억의 변형일 뿐이다. 그러니 기억 소자에 없는 것은 결국 상상해 낼 수 없다. ‘막구공설(莫口空設)’, 입으로 공(空)을 설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이가 공(空)을 설명해 왔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심지어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그런 이들은 의식의 한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오온(五蘊)을 관하여 그 작동 원리와 한계를 경험한 이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주장을 할 수 없다.
何名般若 般若是智惠 一時中念念不愚
常行智惠 卽名般若行 一念愚 卽般若絶
一念智卽般若生 心中常愚 我修
般若無形相 智惠性卽是
무엇을 반야라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일순간 생각 생각 중에 어리석지 않으면 늘 행은 지혜로워지기에 곧 ‘반야의 행이다.’ 말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즉시 반야는 끊어진다. 한 생각 지혜로우면 즉시 반야는 일어난다. 마음 중에는 늘 어리석음이 있어 난 수행을 한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며 지혜의 성품도 곧 그러하다.
반야도 여지 없이 행(行)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반야의 행(行)인가?’가는 중요하지 않다. 반야는 형상이 없는 것임으로 마음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럼, 반야를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혜능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순간에 일어나는 생각 생각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어리석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띠(sati), 알아차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과 분리되지 않으면 곧 그 생각에 매몰되게 된다. 그런 상태가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어리석지 않은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혜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어리석은 상태만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이 따로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음과 지혜, 반야는 개념[내용]에 있지 않다. 행동에 있고 현상에만 있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지혜도 만법(萬法)중에 하나고 만법(萬法)은 예외가 없는 것이니 혜능의 마음에도 어리석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혜능은 자신도 수행 한다[:我修]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불교를 너무 학문적으로 접하고 있다. 불교는 ‘실참수행’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수행이 바탕으로 하지 않는 이론은 결국 허무함만 가중할 뿐이다. 물론 해방 이후 열악한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시급하게 대중 포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교학적 불교에 치중한 과거의 형편만 탓할 때는 지났다. 지금이라도 승가의 수행문화를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승교화에 치중해 있더라도 현실 속에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벗어나지 않는 수행프로그램의 개발이 시급하다. 한국불교에서 방관하고 있을 때 서양의 각종 명상법은 이미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승불교의 수행법보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나 티벳불교의 수행법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일반화 돼가고 있다. 사실 새로운 것이란 없다. 모두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미 우리 문화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다양한 불교문화 콘텐츠에서 현대사회에 맞는 수행법과 문화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다만 불교계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그간 이구동성으로 불교의 미래를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걱정하는 만큼 그 대안에 대한 노력은 얼마나 해왔는지 각자 성찰하고 지금이라도 사부대중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내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 나갈 때 불교의 미래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이본(異本) 참고 수정함(旣).
2) 이본(異本) 참고 수정함(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