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도현의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근.
- 안도현의 〈공양〉 전문
5행의 이 시편에서 각행의 결어(結語)는 일곱 근, 육십평, 두 치 반, 칠만구천 발, 서른 근이다. 안도현 시인은 운문문학(韻文文學)인 동시에 서정문학(抒情文學)인 시에서는 좀처럼 쓰지 수리학적(數理學的) 용어로 시적 감동을 배가(倍加)하고 있다. 근은 무게의 단위이고, 치와 평은 척관법에서 쓰는 길이와 넓이의 단위이다. 물론 수리학적 용어가 시에 전혀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당 서정주가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8할(割)이 바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라는 표현을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비율을 나타내는 의존명사인 할(割)이라는 단위로 계산한 것에 놀랐고, 그 ‘8할이 바람’에게 양육(養育)됐다는 회고적(回顧的) 고백의 표현에 다시 놀랐다.
안도현의 〈공양〉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여서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와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와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과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와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을 정량화(定量化)한 것에 놀랐고, 그 기이한 자연의 수치들을 〈공양〉이라는 숭고한 제목으로 환치한 것에 다시 놀랐다.
공양(供養)은 삼보(三寶)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물(供養物)을 올리는 것을 일컫는다. 부처님께 올리면 불보공양(佛寶供養), 불법(佛法)에 올리면 법보공양(法寶供養), 승가(僧家)에 올리면 승보공양(僧寶供養)이라 한다. 이러한 공양의식은 불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려시대에는 승려에게 공양하는 반승(飯僧)이 성행했는데, 5만여 명의 승려에게 공양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사찰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큰 법회가 열릴 때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을 봉행해왔다. 한국불교계가 공양을 중시해온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불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중 후자에 속하고, 그러다보니 6바라밀(六波羅蜜) 중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해왔다.
〈공양〉은 두 가지 점에 흥미롭다. 하나는 공양을 하는 주체는 명시돼 있는 반면 공양을 받는 객체는 명시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나마 명시돼 있는 공양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자연, 나아가서는 우주의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산(山)벌은 날갯짓소리로, 칡꽃은 향기로, 백도라지 줄기는 슬픈 미동으로, 소낙비는 오랏줄로, 매미는 울음으로 공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양의 주체는 곤충(산벌, 매미)과 식물(칠꽃, 백도라지) 등 대체로는 유정물이지만 소낙비처럼 무정물인 경우도 있다.
안도현 시인은 소낙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고사(古寺) 인근의 외딴집에서 이 시편을 지었다고 한다. 자연과의 합일된 상태에서 쓰인 시여서인지 이 시편에는 주객, 즉, 공양을 올리는 주체도, 공양을 받은 대상도 결국은 자연으로 귀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동산스님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마삼근(麻三斤)”이라고 일갈했으니, 〈공양〉의 표현이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마삼근은 《무문관(無門關)》 제15칙 ‘동산삼근(洞山三斤)’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나라 때 한 장정이 나라에 바쳐야할 납세가 마삼근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동산스님은 “부처가 되는 길은 납세의 의무처럼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벽암록(碧巖錄)》의 제45칙은 ‘조주청주포삼(趙州靑州布衫)’이다. 그 내용을 풀이하면 ‘모든 존재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청주에서 베적삼 한을 벌 만들었는데 베적삼의 무게가 일곱근’이다.
동산의 세 근도 옳고, 조주의 일곱 근도 옳을 것이다. 분별하지 않는 사람만이 시냇물 소리에서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산색에서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