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⑯
名爲淸淨法身 自歸依者 除不善行 是名歸依
何名爲千百億化身佛 不思量 性卽空寂
思量卽是自化 思量惡法 化爲地獄 思量善法
化爲天堂
이름하길 청정 법신이다. 자신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선(善)하지 못한 행을 없애는 것이다. 이름이 귀의이다. 어찌하여 천백억 화신불이라 칭하는가? 사량할 수 없는 성품으로 텅비어 고요하기 때문이다. 사량하는 즉시 자기화 된다. 법을 잘못 사량하면 지옥이 되고 바르게 법을 사량하면 천당이 된다.
‘자귀의(自歸依)’라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의 몸을 먼저 떠올리거나 몸 안에 귀의할 대상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그리고 만법이 청정한 법신이라고 배웠으니 내 안의 법신에 귀의하면 될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혜능은 그보다는 쉬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단지 선하지 못한 행위를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 법신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허망한 일이 될 수 있어 자귀의 하는 일이 개념의 차원으로 끝나게 될 확률이 높다. 마음은 사량하는 즉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형태로 작동된다. [思量卽是自化] 생각이 ‘나(我)’일 수는 없다. 그래서 ‘악한 법을 사량하면 지옥으로 가고 선한 법을 사량하면 지옥으로 간다. (思量惡法 化爲地獄 思量善法 化爲天堂)’ 라는 기존의 해석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해석 같지만 모순이 있다. 법(法)에 어찌 선악(善惡)이 있겠는가!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진리에는 시비(是非)도 없고 선악(善惡)도 없다. 그래야 무아(無我)이고 공(空)일 수 있다. 선악(善惡), 시비(是非)는 중생심에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악법(思量惡法)을 ‘법을 잘못 사량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법을 잘못 사량’하는 것이 무엇일까? 혜능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량하는 즉시 자기화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개념에 붙들린 심리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량하되 그 개념에 머물지 않게 하는 힘을 기른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 사념처 수행이다. 이런 차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혜능은 설명 중간중간에 ‘~시명, 이름하길~’ 등을 첨부하고 있다. 이런 선지식의 노고에 힘입어 후학들은 글이나 말을 대할 때 의식이 개념에 붙들려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매 순간 돌이켜야 할 것이다.
毒害化爲畜生 慈悲化爲菩薩 智慧化爲
上界 愚癡化爲下方 自姓變化甚名
迷人自不知見 一念善知慧卽生
一燈能除千年闇 一智能萬年愚
독하고 해로운 것은 변하여 축생으로 태어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된다. 지혜는 변하여 천상계에 태어나고 어리석음은 변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자성(自性)도 변화가 과하면 개념이 되어 사람들을 미혹시켜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한 생각 잘 알면 지혜가 즉시 일어난다. 한 등잔의 불빛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제거하고 하나의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물리친다.
중생들이라면 누구나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소망할 것이다. 이생에서 준비할 일이 부와 명예, 학식이 아니라 독한 마음이나 남을 해롭게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고 자비의 마음과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키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기존 불교의 지나친 엘리트화와 일부 기득권이 갖는 독점화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자성변화심명(自姓變化甚名)’ 이본(異本)에는 명(名)을 ‘다(多)’로 수정하여 ‘자성은 변화가 심히 많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처럼 해석하면 다음 문장과의 인과(因果)관계의 설명이 다소 미비하다. ‘명(名)’으로 해석하면, 사람을 미혹[:迷人自不知見]만드는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오감(五感)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단지 ‘이름·개념·이미지’일 뿐인데 이것을 실재(實在)로 인식하는 의식의 오류를 설명해 주는 역할로 자연스럽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돈황본 5종 중에 이 대영박불관 본(本)이 모본(母本)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된다.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闇)’ 한 개의 등이 천년의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는 참으로 감동적인 비유이다. ‘한 번의 빛’이라고 해도 무관하다. 지금껏 어리석게 살아왔더라도 단 한 순간의 깨달음이 그동안의 무지(無智)를 반복시키지 않게 하는 힘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한순간의 깨달음은 어떻게 올까? 그것은 알아차림을 기반으로 한 돌이킴에서 온다. 돌이킴은 알아차림의 힘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알아차림은 《대념처경》에서 그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알아차림에 관한 가르침은 초기 경전에서 자주 등장시킨다. 그만큼 지혜를 증득하게 하는 핵심 수행법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인간의 의식작용은 대상을 보는 즉시 그것과 접촉한다. 즉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직진하고, 그 대상에 안착하는 특성을 갖는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억하고 판단하는 것들도 물론 그 대상에 속한다. 의식이 대상들로 향하거나 이미 머물고[-판단하고 분석하는 일] 집착하는 기존의 작용 방식에 대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알아차림’이다. 이것은 상상이나 논리로 이해되었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씀’의 물리적인 현상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마치 자동차의 제어장치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거나 줄다리기의 팽팽한 긴장감의 유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음에 이런 힘을 길러내는 것이 알아차림의 수행이다. 이 수행은 아는 ‘것’이라는 개념의 차원이 아니다. 그 순간 힘을 쓰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실질적인 ‘힘씀’의 물리적인 현상이 없이 단지 인지했거나 알았다고 하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알아차림 수행을 가볍게 생각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판단은 실질적인 알아차림의 힘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알아차림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의 힘을 내어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상근기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에도 알아차림이 근간이 된다. 이 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화두(話頭), 공안(公案)의 타파도 이 알아차림, 또는 알아차림의 확립을 위한 수행에 불과하다.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능가경의 여래장 사상은 적극적으로 세속의 정서를 인정하며 수승한 보리심으로 제도(濟度)시켜 나갔다. 인간이 갖는 간사한 중생 심리까지도 깨달음을 얻게 하는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한 예가 삼요(三要)1)인 것이다.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지루한 여정을 인간의 마음이 갖는 본능적인 정서를 세 가지로 정리하여 훌륭한 수행의 길라잡이로 삼게 한 것이다. 업(業)은 마음이 대상으로 직진하여 그것을 사량하는 동안 업보(業報)는 쌓이게 된다. 집착의 현상이다. 그러나 이 때에 알아차림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면 그 대상과 분리되고 그것에 연이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생각이 자기 방식대로 순환하던 상태에서 멈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2차, 3차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아 의식의 업(業)은 쌓이지 않게 되는 원리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비록 짧은 순간이라도 이런 ‘멈춤, 분리’의 현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업인(業因)의 륜전(輪轉)현상이 멈춰졌을 때를 무심(無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선 업장(業障)이 개입 될 여지가 없다. 12연기의 순환의 고리가 끊긴 상태이다. 이렇게 되면 찰라 지간이지만 해탈이다. 찰라 해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깨어있음이 한순간만 일어나도 분명히 그 빛은 천 년 동안의 어둠을 물리친다. 한 번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돌이킴에서 오며 돌이킴은 알아차림을 전제한다. 이 과정이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마음에 근육이 생겨 지혜라는 안목이 열린다. 마음에서 지혜의 힘이 생기면 결코 어리석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물과 기름이 시공간을 같이 공유하 수는 있어도 서로 섞이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참선에서 갖추어야할 주요 3가지의 중요한 마음 가짐. 1.대신근(大信根) 2.대분지(大憤志) 3.대의정(大凝情)-서산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