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⑭

善知識 惣洎自體 與受無相戒 一時 逐惠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於自色身 歸依淸淨法身佛
於自色身 歸依千百億化身佛
於自色身 歸依當來圓滿報身佛 (已上三唱)

선지식이여, 자신의 본체(體)에 스며드는 모양 없는 계를 받으시오. 동시에 혜능의 입의 도를[口道] 따라하라. 친애하는 선지식이여, 자신의 삼신불을 보아라! 자기 색신의 청정법신에 귀의하라. 자기 색신의 천백억화신에 귀의하라. 자기 색신의 당래 원만보신불에 귀의하라. (이상 삼창)

 

육조단경은 전통적인 수계(受戒)형식을 거부하여 위엄이 넘치는 계단(戒壇)의 격식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무상(無相)의 단(檀)에서 무상(無相)의 계(戒)를 설한다는 것은 기존의 《범망경》대신 공(空)의 가르침인 《금강경》을 설하는 것이다. 또한 혜능은 금강경마저도 기존의 문자로 된 경(經)이 아니라 모양 없는 자신만의 금강경을 설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기에 삼신(三身)에 귀의하는 것 또한 이런 취지에 부합되어야 할 것이다. 색신(色身)을 있게 한 그것에 귀의하라고 한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일정한 상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법을 설함에도 빈틈이 없다. 그 예는 ‘축혜능구도(逐惠能口道)’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일반적인 해석은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거라!’ 정도이다. 그런데 문장 앞에 ‘따라하다.’의 축(逐)이 있음에도 뒷부분에 왜 굳이 ‘구도(口道)’라는 말을 붙였을까? 그것은 그 자리에 있는 군중들뿐만 아니라 후학들로 하여금 혜능의 말에 붙들리지 않게 함일 것이다. 즉 금강경에 ‘정해진 법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름으로 정해질 여래 또한 없다고 하였으니, 혜능이 하는 말 또한 입에서 나오는 ‘도(道)’라는 소리일 뿐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님을 재차 상기시키는 것이다.

특히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쫓아가게 하는 강력한 도구다. 이런 의도의 말이었다면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관통하여 실전에 적용시킨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육조단경은 형식이 달라도 금강경 핵심 사상과 그 법을 전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서는 반복적으로 ‘자색신(自色身)’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의 삼신(三身)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삼신(三身)이 자신의 몸에 있음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혜능은 왜 이런 형태로 말하는가? 그 시대의 문학적 특성일까? 아니면 혜능이 일자무식이라서 격에 맞는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사람의 의식은 대상을 쫓아가는 강력한 특질을 갖고 있다. 부처님의 삼신(三身)이 제시되면 듣는 이는 자기의 몸을 놓친다. 자기를 떠나 허상을 좇는다. 그렇다고 자기의 몸을 놓치지 말라는 것은 자기 몸에 집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온(五蘊)을 조견(照見)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챙김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즉 의식이 지금 이 순간을 떠나서 생각(개념)에 머물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그 대상이 부처님이라도 마찬가지고 진리여도 예외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금강경의 실천적 수행법이다. 자기 색신(色身)에서 삼신(三身)을 본 이가 어찌 아상(我相)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이를 의심하고 걱정하는 이는 경(經)의 가르침을 이해한 후 단 한 번도 자신에게서 증험하는 일을 해보지 않은 이다. 오로지 관념으로 이해한 것을 수행한 것으로 착각한 데서 기인한 망령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色身是舍宅 不可言歸向者 三身在自法性
世人盡有 爲名不見 外覓三如來
不見色身中 三性佛 善知識聽 汝善知識設
令善知識 依1)自色身 見自法性 有三世佛
此三身佛 從性上生

색신(色身)은 집채임으로 귀의의 대상으로 삼을만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삼신(三身)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은 법의 성품이다. 세인들에게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름 가지고는 볼 수 없다. 밖에서 세 여래를 찾으려 하니 색신(色身) 중에 있는 세 성품의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선지식은 새겨들어라, 그대 선지식에게 설한다. 친애하는 선지식이여! 자신의 색신(色身)을 의지하여 자신의 법에 성품을 보아라. 삼세(三世)의 부처가 있다. 이 삼신불은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전 단락에서 말한 ‘자신의 색신(色身)이 삼신(三身)이고 그것에 귀의하라[:見自三身佛 於自色身]’는 가르침은 중생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중생들은 모두 각자의 경험과 기준으로 외부의 정보를 이해하는 일수사견(一水四見)2)의 한계를 갖고 있다. 혜능이 굳이 중생들이 자기식대로 알고 있는 ‘색신(色身)에 귀의하라!’고 하는 그 의도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 자신의 색신(色身)은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반면에 청정하다고 여기고 있는 법신(法身)만을 찾는 것은 단지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한 허상임을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형상에 붙들려 외형적 몸뚱이를 쫓아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신(色身)은 집채임으로 귀의’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색신(色身)에서 법신(法身)을 찾느라고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는 말이다. 모양만을 쫓아가는 의식의 습관[:밖에서 여래를 찾으려하니,]에서 그 마음을 돌이켜 모양 이전 자리로 가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의 전환은 이분법적 사고(思考)의 틀에서는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 물든 의식은 이분법적 사고방식만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수많은 지식을 갖게 되지만 지혜는 멀어져만 간다. 그래도 지식을 징검다리로는 쓸 수는 있다. 징검다리는 단지 물을 건너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돌멩이에 불과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징검다리가 목적일 수 없다. 작금의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지식이 이미 종교화 돼버렸다. 과학도 단지 지식정보 중의 하나일 뿐인데 교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허망한 지적(知的) 차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돌이킴’을 통한 성찰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반조를 패배자의 자기 위로를 위한 소심한 자기 합리화로 여기는 성향이 짙어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인에게 승리자는 오로지 뒤돌아봄이 없이 앞으로만 전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성찰은 없고 분석만 있다. 얼마나 세밀하게 해체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느냐가 미래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여긴다. 불교의 가르침을 대하는 태도도 이런 패러다임에 갇힌 지 오래다. 승려의 수준도 세속의 기준으로 판단된다. 어떤 대학을 나왔고 박사학위는 몇 개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설법의 신뢰도가 결정되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세태를 방치하면 승가의 교육인프라는 세속의 학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승가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 문화를 더욱 확고히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학문을 배척하자는 말은 아니다. 학문적 알음알이에만 머물지 말고 그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견자법성(見自法性)’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법성을 본다.’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진아(眞我)’,‘불성(佛性)’ 등을 찾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아[假我:거짓된 자아, ego]’를 버리려는 마음이나, ‘진아(眞我)’를 구하는 마음은 똑같은 집착심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혜능의 ‘견자법성(見自法性)’을 이런 편착(偏着)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있는 법의 성품을 보는 자(者)는 누구인가? 결국 법성‘(法性)’도 에고가(ego) 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고(ego)에게 법성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에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논리의 모순이 발생하기에 에고가 본 것도 즉시 ‘아(我)’를 제거하면 본 성품을 회복한다. ‘견자법성(見自法性)’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우선 대상을 찾는 마음의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 안에서 법의 성품은 스스로 작용하기에 에고(ego)도 본래 뿌리인 법성에 녹아들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自性), 법성(法性)’인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본서에는 衣를 依로 수정함.
2)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 곧, 같은 대상이지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각각 견해가 사뭇 다름을 비유하는 말.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