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대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 인간이 성도(成道)하여 만든 법이기는 하나 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고 있던 원초적(原初的)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는 20대 후반의 순박한 시골청년으로서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던 젊은이였다. 그는 취직을 못해 안달을 하다가 어떤 거사의 권유로 콩나물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콩나물 단지들을 싣고 막상 나섰지만 어디를 가야 잘 팔리고 어떻게 해야 많이 파는지를 통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다 못해 그는 결국 콩나물 장사를 하던 거사의 뒤를 따라가면서 앞에서 ‘콩나물 사려!’하고 외치면 뒤에서 ‘나도’, ‘나도’하고 소리치고 다녔다는 것.그는 그 후에 콩나물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음료수 대리점을 거쳐 현재 서대문로타리 근처에 건물을 산 부자가 됐지만 그가 처음 배운 장사의 기법은 그저 남을 따라다니면서 ‘나도’, ‘나도’ 소리치는 것이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수행도 그 청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흠모하고 상구보제(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도리를 다하는 데는 첫 번째 선구자적인 수행의 길을 갔던 조사나 선사, 성현들의 숨은 정신적인 말을 흠모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를 지니는 것이다.그러나 한 가지 변화하는 것은 바로 장사의 기법이 바뀌듯이 조사, 선사, 성현들의 말씀을 받들고 실천하는 데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장사를 시작한 그 청년은 처음에 손수레를 가지고 육성으로 소리치고 다녔지만 지금에 와서는 최소한 픽업 트럭에 확성기를 갖고 다니는 모습으로 행상 방법이 바뀌었다. 불교의 진리, 종교의 진리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본질적인 것보다는 바로 그것을 담는 그릇과 전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30년 전 먹던 콩나물과 지금 현재 먹고 있는 콩나물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먹으면 신체가 강건해지고 그 신체를 바탕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식품으로서의 콩나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콩나물을 파는 방법은 장사꾼에 따라, 아니면 부자 동네, 달동네 등 팔리는 장소에 따라 천태만상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 불교는 일천육백년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지자들의 희생적인 포교가 있었으며 면벽참선의 인내 수행, 용맹정진한 선배들의 땀이 묻혀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수많은 운수납자들이 속세를 떠나 입산 길에 나설 때, 뿌렸던 그 뜨거운 눈물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한국의 불교는 그토록 뜨거운 마음을 갖고 살았던 선객들의 구도심과 불법에 대한 정열 때문에 현재까지 지속돼 내려오고 있다.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그 진리의 도를 펴는 방법은 좀 더 다각화 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된다.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 불법의 생활화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최근에는 세속과 산간, 승려와 평신도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향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으며 불교의 한국화를 위해 또는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지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서울.그 북적대는 도시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서로 부딪치고 사랑하고, 눈물 흘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배기가스와 오염된 수돗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집안에서 수백 미터 밑으로 개인용 우물을 파서 생수를 먹는가 하면 생수, 광천수를 사서 오염된 물을 피해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현재 오염된 물, 오염된 공기를 피해 살 수 있는 현실이지만 과연 그러한 노력이 무병장수라는 결과로 나타날지는 의문이다.지구촌 전체가 나쁜 가스와 공장 폐수, 비료, 농약 등에 의해 복합적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빛마저 자외선을 내뿜고 있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대책이나 개선 없이 자신들만이 그 도탄에서 벗어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차길진법사(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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