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함께 서울 명동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옷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외식하러 나온 사람들, 데이트하러 나온 연인들로 북새통이었다. 인간들이 울고 웃고 부대끼는 서울의 복판 명동. 금융, 패션, 종교, 영화가 밀집된 이곳이야말로 시장 중의 시장(市場)이다. 찻소리, 손님을 끌려는 호객꾼들의 목청이 엉켜 산란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낭랑한 목탁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유심히 찾아보니 한 스님이 불전 함을 앞에 놓고 돗자리 하나 깔고 열심히 목탁을 치고 있었다. 명동 한 복판에서의 수행. 정적(靜寂) 속의 산사에서 정중정(靜中靜)보다야 시장 속에서 동중정(動中靜)이야말로 마음공부에 제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불전함에 불사를 했다. 그랬더니 옆의 지인이 투덜거렸다.“법사님, 저 중은 진짜 중이 아니에요. 법사님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네요.”스님을 가장해서 매일 목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행인의 지갑을 털어 가는 가짜 탁발승이라고 했다. 하루 영업(?)이 끝나면 저녁에는 옷을 갈아입고 탁발한 돈으로 술집에 드나든다는 것이다. 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나는 저 탁발승에게 돈을 준 게 아니라 부처님에게 불사한 것일세.” 탁발승이 불사금으로 술을 사서 마시건 아가씨 팁으로 주건 그 용도는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복을 받든 벌을 받든 그 사람의 일이다. 불사는 돈을 바치는 의식이 아니다. 돌아가신 부처님께서 돈을 어떻게 쓰겠는가. 기독교의 십일조나 불교의 불사나 모두 베푸는 마음을 배우자는 것이다. 자기 소득의 일부를 신(神)에게 바쳐서 일상생활에 감사한다는 마음을 내자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배우자는 것이지 부처님의 환심을 사자는 것이 아니다.지인은 남을 의심하는 마음(사리분별)부터 앞서 있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형상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유명한 일화로 ‘처녀를 업은 스님’ 이야기가 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개울물을 건너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처녀를 한 스님이 덥석 업어서 물을 건네주었다. 한참 길을 가다가 옆에 있던 스님이 아까 일을 떠올리며 그 스님에게 계율을 들먹였다. 그러나 처녀를 업었던 스님이 말했다.“스님은 아직도 그 처녀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개울을 건네주고는 바로 잊었소.”연정(戀情)의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거나 속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감정)을 잘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있다. 명동에서 지인과의 일화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구명시식을 하면서, 특히 종교 분별심의 폐해를 절감한다.구명시식 자리. 일이 안 풀리는 자손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초혼했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전통적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후손들이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가족 납골당을 조성하느라 화장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머니 영가는 왜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느냐고 분개하였고 아버지쪽 영가들은 왜 화장을 했느냐고 노발대발이었다. 서로 자손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자손들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종교는 모름지기 인간 영혼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언제부터인가 종교가 인간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있다. 각자의 종교 교리에 묶여 마음을 구속하고 있다. 부처님은 법(法)이 없다고 했다. 만약 하늘 아래 법이 있다면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유일법(唯一法)이 아닐까. -차법륜 법사(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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