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앙은 곧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신행의 기본이요, 으뜸이요,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일 것입니다. 물론 종교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교리적 측면, 신앙공동체라는 조직적 측면, 세속사회의 일부로서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대사회적 측면 등도 엄존하지만, 원초적으로 종교는 ‘개인의 일’인지라 기도는 신행의 가장 핵심입니다. 사회적 차원이든 개인적 차원이든 구원 또는 해탈이라 할 그 어떤 경지가 종교의 궁극이라 할 때, 종교는 결국 ‘실천’이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까닭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세태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선각들이 기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는지를 조금 알아볼까 합니다. 기도는 각성과 실천과 실존의 문제이지 논리와 체계와 객관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도는 ‘드리는 것’이지 사고의 대상은 아닙니다. 기도도 하지 않는데,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일견 전도된 행태일 수 있지만, 기도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혹시 기도하게 되려는지 일말의 기대를 스스로에게 걸어봅니다.기도하는 방식은 종교나 문화나 개인에 따라 여러 모습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침묵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절규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염불이나 찬송 또는 명상 등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오체투지나 요가 자세의 기도도 있습니다.이 모든 기도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될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구한다’일텐데, 그 구하는 것이 물질적일 수도 있고, 세속적 행복일 수도 있도, 정신적 평안함일 수도 있고, 절대 존재와의 합일일 수도 있고, 우주 진면목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두 선각의 이야기를 들어보렵니다.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와 불교의 틱낫한 스님입니다. 에드워드 공항에 내린 마더 테레사에게 어느 기자가 다가와 “미국인에게 전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답니다. 테레사는 “더 많이 베푸세요”라든지 “서로 더욱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주저없이 “그래요. 미국인들은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라고만 말했다고 합니다.마더 테레사는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된다’고 단언합니다. 기도해야 사랑이 생기고, 사랑해야 봉사할 수 있으며, 자기를 비우는 봉사를 통해 평화가 이룩된다는 요지입니다. “주기 위해서는 먼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지녀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없이 일하는 것은 노예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고귀한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고귀한 일이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종교가 그 무엇이든 우리는 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에는 여러 측면이 있을 겝니다. 찬탄, 감사, 간구, 참회, 회향(중보). 이 모든 측면은 다 연결돼 있다고 봅니다. 이들이 단절된 기도라면 참기도가 되기 어렵습니다. 구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요, 구하기만 하는 기도도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복과 기도를 구분합니다. 기도와 기복은 다르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기도는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다만 어떤 ‘복’을 비는 것인지가 다를 뿐입니다. 물론 윤리도덕적으로는 차등이 있을 것입니다만 실존적으로는 그리 구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한 영혼을 그 누가 감히 고결하다 아니다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테레사 수녀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그렇습니다. 마음 안팎으로 소란하니 기도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내 속도 시끄럽고 세상도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참기도는 조용한 곳을 찾는 법입니다. 다시 시끄러운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영혼의 고요함, 눈의 고요함, 입술의 고요함을 지닐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하라고 조용히 행동으로 타이릅니다. 눈을 닫고, 입을 닫고, 그리고는 마음을 열고, 어린아이의 단순함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틱낫한 스님은 기도에 대해 선언적이라기 보다는 조목조목 설명을 해줍니다. 한마디로 “기도는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되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되는 ‘뜻’을 ‘전달’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위대한 힘이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이거나, 우리 내면 깊이 존재하는 영적인 힘입니다. 이 위대한 힘에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보내는 순간 그것은 진실한 기도가 됩니다”테레사 수녀와 틱낫한 스님 모두 기도의 원리를 에너지의 소통, 또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설명합니다. “기도할 때 믿음과 자비, 사랑의 에너지는 전력(電力) 구실을 합니다. 전력 없이 기도한다면 코드가 뽑힌 전화선에 대고 애기하는 것과 같지요. 우리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다면 이같은 이유 때문입니다”기복과 기도가 별개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사랑과 자비 없이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바라는, 소위 미신적 기도는 소통되지 못한 채 소멸하고 그 자리에 결국은 참기도가 들어서리라는 믿음입니다. 특히 틱낫한 스님은 불교의 인과응보와 관련,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변하면 보이는 대상 역시 변합니다. 즉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변한다면 ‘신의 의지’ 역시 변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한 과거 업의 결과도 바귈 수 있을 것입니다”고 지적합니다.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로부터 기도가 나올 때 그 기도에는 자비와 연민이 실릴 것입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말합니다.“불상을 향해 절하는 것은 내 안의 부처님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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