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종무원 연수교육 도성스님 강의록 8월 3,4일 김제 조앙사에서 열린 전북 종무원 연수교육은 교구단위 올해 첫 승려 연수교육이라는 차원에서 무척 고무적이다. 참가한 스님들도 재충전의 좋은 기회였다고 입을 모은다. 전 종도들이 함께 나누자는 의미에서 전북종무원 감사원장 이혜명스님의 개회식 격려사와 포교원장 도성스님의 '불교 바로 알고 바로 알리자'는 주제의 강의록을 전재한다. 1. 복숭아를 한 입 씹는다.씨가 나온다. 그걸 흙 속에 심었더니 다시 복숭아가 열렸다. 그러나 씹어 먹는 과육은 땅에 묻어둬도 다시 복숭아가 안 된다.세상만사 이치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는 핵심이 있다. 그게 작동돼야 무슨 일이 이뤄진다. 공연히 변죽만 울려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런데 세상은 바야흐로‘변죽세상’이다.‘수단 세상’이다.‘제스처 세상’이다. 이 사람 만나면‘이 길이라 하고’저 사람 만나면‘저길이라고’목소리를 돋운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갑론을박, 이현령비현령, 고언영색, 중구난방...2. 근본불교를 가리는 어두운 현실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불교는 교가 아니다 -不敎-. 관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니 길도 없다. 길이 없으니 보통 사람은 길을 찾는다. 그래서 외딴 암자의 돌이끼처럼 진정한 불교권에는 인적이 드문 법이다. 그게 매력이고 불퇴전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길 없는 길 속에 길을 내려고 안달이다. 불교는 안 그래도 된다. 잔잔한 흐름들은 타 종교에 맡겨버려도 된다. 허둥대면 다른 흐름과 똑같아진다. 유위지법(有爲之法)이 아니라 무위지법(無爲之法)이 핵이다. 결국 大馬는 불교권으로 흘러들어온다. 잔 제스처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바위산처럼 의젓하게 세상을 볼 일이다. 불교는 원래 그랬다. 그 느낌을 살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렇질 못하다. 우선 일갈로 머릿글을 잡는다.세태를 보면‘진리불교’가 아니다. 심하게 말해‘비지니스 불교’기류가 불자들의 유전자를 오염시킨다. 그걸‘불교활성화’라고 말하면 다 할 말이 없다. 이 포교당의 이 주지는 이 가르침을, 저 포교당의 저 주지는 저 가르침을 내놓는다.물론 성경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하나님 사상을 전파하는 천주교, 기독교 성직자들도 자신만의 독특한 성서관을 신자들에게 주입시키기도 한다. 허나 그 편차는 불교만큼 크지 않다. 물론 편차가 큰 것을 ‘불교 역동성’의 한 잣대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 편차가 ‘역동’이 아니라‘혼돈’으로 비친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법회 장면을 지켜본다.무슨 말들이 오고가는가? 부끄럽지만 주지 스님의 법담(法談), 설법(說法)이 아니라 한담(閑談)이 이어지는 경우가 급증한다. 물론 도심지급 사찰은 덜하지만 시골 사찰급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노골적이다.정석 위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한담류의 선문답은 응용 대목이다.그런데 근본 불교의 진면목을 맛보지 못한 초심자들에겐 이런‘한담성 설법’이 불교의 정석인 줄 착각하기 십상이다.지금 포교당문화는 불단과 단청을 제외하고 나면 저작거리 문화센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도들도 근본불교에 목말라 하지 않고 그냥 무병장수, 부귀영화에 대한 일념밖에 없는 듯하다. 신도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40ㆍ50대 여성주부들, 이들은 일상사에서 벗어나 입담 좋은 주지스님을 만나 한바탕 신나게 웃고 후련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댓가로 몇 만원의 보시금을 내는 것을 불교의 전부로 알고 있다. 또한 포교당에서도 법당을 마련하기 위해‘무슨무슨 불사’란 명목을 단다.그걸 신심(信心)이라고 자리매김 한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는 계단불사, 기와불사, 종 불사, 단청불사....과연 신도들은 그 속에서 佛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기야 그것도 불교 사랑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3. 다시 불교를 사랑하자지금 우리 불교는 너무 가볍다. 다시 무거워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으로 변하자는 말은 아니다. 너무 잡다한 말만 무성하고 마른하늘에 벼락치는 듯한 청정함과 엄격함, 그리고 단출함이 아쉽다.양적 포교방식에서 질적 포교방식이 절실하다. 화려함, 휘황찬란함의 그늘을 걷어내자.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다. 설령 신도 수가 부족해도 괜찮다.‘절대적 불교정신’과‘상대적 불교정신’있다.절대적 불교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하지만 상대적 불교진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한 마디로 시절법(時節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시절법인가?불교사에도 숱한 혁명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원효, 지눌, 경허, 만해....원효의 화엄적 융화정신, 교와 선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시절에‘권수정혜 결사문(勸修定慧 結社文)’을 통해 새로운 불풍(佛風)을 일으켰던 고려조 지눌(知訥), 신라조 원효의 정신을 근대적으로 이어받아 불교대중화에 앞장섰던 경허, 일제하 민족불교의 새로운 좌표를‘불교유신론’으로 제시한 만해 한용운, 뉴 밀레니엄.우리는 정보화 세상 속에 살고 있다.사이버 세상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신세대들은 역대 위인들보다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기성세대들은 곧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있다. 철딱서니 없다는 말을 듣던 그 X세대가 역사의 중추세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불교도 허둥대고 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티즌들을 위한 사이버 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듯 다양한 홈페이지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도 사이트를 마련했다. 그것이 과연 대세인가. 절대적 정신일까.필자는 그 흐름은 상대적 흐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감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함이 경쟁력을 갖는 시절이 곧 온다.그 방중논리는 대충 이렇다. 검둥이든 흰둥이든 사람들의 구조는 비슷하다. 나라마다 나라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개념, 즉 마음이란 갓이 있다. 이 마음이 자초하는 수 많은 문제가 깔려있다.기독교는 불안한 마음, 미래가 없는 현실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 불안한 마음바탕의 구조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흔들리는 종잇장 같은 마음을 반석같은 하나님한테 줘버리면 영원한 마음의 평화가 보장된다는 논리다.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마음을 항복받아 육도 윤회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성제, 8정도, 12연기법의 근본가르침을 타 종교와 구별되는‘불교 교리의 꽃’이다.그런데 갈수록 이 정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 요란한 불사의 폐단이랄까. 자꾸 기독교의 전도방식을 답습하려고 한다. 그래선 기독교의 그 현란한 전도력을 능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특화적 발상이 뒤따라야 하겠다.그건 일반 불자들이 부정적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내가 곧 부처’라는 절대적 확신을 갖는 것이다. 불자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야겠지만 승려도 확인시켜줄 의무가 있다.그런데 승려들이 일반 신도들을‘무명의 화신’으로 폄하한다면 근본불교의 자리로 오기보다는‘기복불교’의 추종자로 전락한다. 그것을 확인시켜준다고 승려들의 권위가 실추되는 건 아니다. 승려가 신도들에게“당신들은 나와 같은 불성을 갖고 있소. 나라고 더 나은 것도 없소”라고 말하면 불자들의 마음은 더욱 부드럽고 깊어질 것이다.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승려들은 불자들을 하대한다. 신앙의 주종관계가 그렇게 형성돼서는 안 된다.그렇다면 이제 다시 선(禪)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경(經)과 계(戒)를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뉴밀레니엄 선풍(禪風)이다. 불교가 타종교와 구별지을 수 있는 대목도 바로 이 대목이다.복을 붙들지 말고 복을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 덫 같은 마음을 붙들고 참선의 세계속으로 들어가 보자. 있는 것 다 있는 콘크리트 담 같은 불교가 아니라 돌 담같은 불교로 돌아가야 할 시점에 도래했다.이제 없는 곳은 죽는다고 아우성이고 흘러넘치는 곳에서 흥청망청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이웃을 향해 쌀 한 줌이라도 쥐어 줄 때이다.해쓱한 불교의 몸을 애정의 손길로 한 번 안아주자.한 손에는 지혜, 또 한 손에는 자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