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발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개사찰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1> 우리는 지금, 부분(部分)을 합하면 전체(全體)보다 크고, 부분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인생을 영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에 관점(觀點)을 집중하고 있으며, 부분에 대한 자기의 관점을 논리적인 체계에 담아내고자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전체보다는 부분의 확장이나 부분의 완성에 전력을 경주한다. 자아의 완성이나 자기유지능력의 함양이라는 표현도 역시 부분을 중심으로하는 철학으로부터 파생된 표어들이다. 이와 같은 <부분의 철학>은 사실은 서양철학의 근원적 테마이다.서양 사람들은 부분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파고 들었다. 물질을 분석하고 쪼개서 최종적으로 남는 입자를 찾아냈다. 분해하고 쪼개서 최종적으로 손에 들려지는 실체를 얻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이와 같은 물리실증주의(物理實證主義)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모든 입자들을 분해했다. 그런 연후에 논리를 통해서도 모든 것들의 완전한 실체를 규명하고자 애를 썼다. 존재의 구조와 조직체계를 연구한 후 그 결과를 이론적 체계속에 함축하고자 고심했다. 다시 말하면 물리실증주의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를 병합해서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법론에 있어서만은 과학적 방법론을 상회하는 것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전근대적 사고체계를 버리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전환한 사람들은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고, 부분은 전체로부터 분리가 가능하며,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자기 앞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다보니 자기주장과 자기합리화가 거세고 드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2> 동양 사람들의 관점은 <부분의 철학>과 반대다. 동양인들은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해부하기 보다는 부분과 분의 연관성이나, 부분과 전체의 히든 커넥션에 관심을 두었다. 동양인 중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체속에 부분이 들어가지만, 부분속에 전체가 들어간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로부터 한 발자욱 더 앞으로 나가서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오고 가는 운기(運氣)나 부분과 부분이 갖춘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 교환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서로 서로 다른 부분들이 서로가 서로의 성립을 위해 도움을 주고 받는다.불교인들이 갖춘 (1)전체가 곧 부분이요, (2)부분이 곧 전체이며, (3)모든 부분들이 갖춘 보편성과 특수성이 원융회통한다는 세계관은 <부분의 철학>을 뛰어 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을 물리치고 일어선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의 <장의 이론>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문제는 불교인들의 삶의 태도이다. 전체와 부분은 물론이며, 부분과 부분의 연관성을 중요시한 <관계의 철학>을 갖춘 불교인들이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자리에만 연연해 있다. 한국불교라는 큰 기틀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절, 자기의 보루만을 챙기고자 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예속되어 있는 종단(宗團)에도 관심이 없다. 종단의 힘이 미역해지면 자기의 절도 따라서 미약해 질 것이 자명함에도 자기의 눈 앞에 있는 자기 절만 생각하고 종단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종단이 커지고 종단이 발전해야 자기의 위상도 그에 따라서 커지고 높아질 일임에도 불고하고 종단이야 망하거나 흥하거나 관심이 없다. 종단의 흥망과 자기의 흥망을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 입으로만 일즉다(一卽多:전체가 곧 부분), 다즉일(多卽一:부분이 곧 전체)이라고 외칠 일이 아니다. 종단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종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단의 발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개사찰의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458호> 0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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