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자기의 삶의 내용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자기의 삶을 결산하는 마당으로 들어서서 지난 과거사를 성찰해 보면 진리와는 거리가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주관적 입장에서는 진리에 접근한다고 했지만 객관적 입장에서 냉철하게 판단해 보면 진리에 접근하기 보다는 오히려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삶의 괘도를 설정한 후 진리의 길에 <나의 길>을 접목시키면서 잘 걷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잘 걷는다고 생각하고 잘 걸었지만 나타난 객관적인 결과는 자기의 지표와 많은 간극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지표의 설정과 나타난 결과 사이의 간극은 결국 진리의 개념을 완전한 형태로 정립시킬 수 없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이 확정적인 틀을 갖추었거나 정형적 형태를 갖추었으면 손쉽겠지만 <사태를 올바르게 표현하려는 판단 내용의 객관적 타당성>이기 때문에 이것만이 <객관적 타당성>이라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만인에게 보편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기 때문에 더더욱 정형화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누구나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길을 걸어왔노라고 자부하면서도 막상 진리의 길이 어떤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이 궁색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진리란 <참된 이치>인 동시에 <참된 도리>라고 간단하게 표명할 수 있지만 <진리에 접근하는 삶>을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압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2>
현대인들의 지적 체계에 광범한 영향을 미친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는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진리에 접근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포퍼는 또 과학은 합리적인 가설의 제기와 그 비판(반증)을 통하여 시행착오적으로 성장한다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ationalism)>의 인식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포퍼의 언급을 통해서 우리가 성찰해 볼 수 있는 내용은 역시 <합리적인 가설>이다. 논리의 실증과 실험의 실증을 유보할 수 없는 과학도 <합리적인 가설>이 없이는 반증(비판)을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의 궁극적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궁극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다가설 수 있는 <합리적 가설>은 제기할 수 있다. 합리적 가설에 관하여 또 하나 유의할 점은 합리적 가설이 과학에만 준용(遵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도 준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이나 만물의 실체에 관한 확고한 신념을 준비한 종교인이라면 과학자 못지 않게 자기 나름의 <합리적 가설>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불교의 근대화과정에서 아주 빛나는 <합리적 가설>을 제기했던 몇 분의 스님을 기억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만해 한용운스님이다. 만해스님은 <불교유신론>을 통해 한국불교의 발전과 전망을 피력했다. 만물의 중심개념과 자기의 신념을 통할시키는 히든 커넥션으로서의 합리적 가설을 준비했던 만해스님은 한국불교의 개혁과 혁신운동까지 전개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만해스님은 불교의 비속한 상태를 신성한 상태로 전화(轉化)하려는 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다.

<3>
요즈음 한국불교 현대화과정에서 일어난 소위 <불교정화운동>에 관하여 관점을 달리하는 의견이 분분(粉粉)하게 일고 있다.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불법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신적 승화나 사물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통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시대적 사상적 진보운동이 <정화운동>이지 제 삼자의 권유에 의존해서 발발한 <사태>에 정화(淨化:더럽거나 불순한 것을 없애고 깨끗하게 함)라는 명사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번지고 있다. 더구나 주체적 임장에 있는 몇몇 어른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거처인 경무대에 들어가서 <사태의 진전>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를 가졌다면 그 또한 자발적 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정화>한다는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이며 그에 따르는 당위성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는 종도들도 수없이 많다. 만일 높이 들려진 <불교정화운동>의 기치(旗幟)가 <불교를 정화하겠다>는 의미란다면 부처님의 언설의 내용과 승가의 구조를 뜯어 고치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부처님이 제시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바꾸겠다는 의미인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여론이다.
더럽거나 불순한 것을 없애고 깨끗하게 하려는 것이 정화인데 정화를 끝내고난 오늘의 현실이 과연 한점 부끄러움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전화되었느냐는 지적 또한 드높이 일어난다.     
다소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불교정화운동>이라는 명제에 당위성의 결여가 감지된다면 마땅히 <승단정화>로 말을 바꿔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더 나가서 이 <승단정화운동>은 어떠한 <합리적 가설>에 의존하여 발발했으며 그와 같은 합리적 가설은 누구에 의해서 정립되었고 이 운동의 전개과정이 합리적 가설에 합당한 운동다운 운동이었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왜냐하면 정화운동이라고 이름 할 수 있으려면 <비속한 승단의 상태>에서 <신성한 승단의 상태>로 전화(轉化)하기 위한 자발적 신념의 발현이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전개 과정에 순수한 불교의 세력이 아닌 국가권력이나 불교의 종도가 아닌 외인부대가 가담하였다거나, 결과적으로 비속한 상태에서 신성한 상태로 전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비속한 상태로 물러섰다면 그것을 가리켜 어찌 신성한 정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핵심과 주축이 되는 이론체계로서의 <합리적 가설>이 참된 이치와 참된 도리에 합당함은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과 괴리되지는 않았는가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이다.
더욱 본질적인 지적은 이 운동의 결실이 <진리에 접근하는 삶>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졌는가, 아니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삶>으로 귀결되었는가를 가려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이 운동의 결과가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삶과 연관성이 깊다면 그것을 가리켜 정화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불교인들은 이제라도 포퍼가 이른 대로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진리에 접근 한다"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의 현대화과정에서 발발한 승단정화운동은 불교학자는 물론이요 수많은 불교 신도들마져 <실수한 운동>이라 이를 뿐 <성공한 운동>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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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퍼 [ Popper, Karl Raimund , 1902.7.28~1994.9.14 ] 영국의 철학자.
오스트리아 빈 출생.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3살때 사회주의 경향의 책들을 읽으며 좌경화하고 이에 따른 단체활동도 했다. 그러나 순수학문에 대해 매료되면서 과학방법론에 빠져들었다. 1918년부터 빈대학, 1925년부터는 빈교육연구소에서 철학·수학·물리학·심리학을 공부했다. 1928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유대계로서 1938년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에 망명했다가 1946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런던대학 강사를 거쳐 논리학·과학방법론 교수를 지내고, 1965년 기사 작위(爵位)를 받았다. 런던경제대학 등에서는 과학방법론을 강의했다. 최초의 저서 《탐구의 논리》(1934)는 그의 과학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주저이자 대작이다. 그는 여기에서 과학은 합리적인 가설의 제기와 그 반증(비판)을 통하여 시행착오적(試行錯誤的)으로 성장한다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ationalism)’의 인식론을 제창, 그 창시자가 되었다. 그 후 이러한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사회과학론·역사론·인간론 등을 전개하였다. 《자유사회의 철학과 그 논적(論敵)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추측과 반박》 《객관적 지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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