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정진 선행되어야 백중기도 효험 있어

<지난호에 이어>
앞에서 이야기했던 지장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조상을 위해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그 공덕이 전부 영가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작게는 7분의 1밖에 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도를 올린 본인과 영가의 후손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조상을 위해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공덕의 힘으로 영가가 왕생극락을 할 힘을 얻게도 되지만 기도를 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더 많은 공덕이 쌓여 좋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법우님들, 앞으로 기도 많이 하셔야 하겠지요?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30년 전부터 우리 절에 오시는 여자신도들을 부를 때 ‘보살’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법 법‘法’자에 벗 우‘友’자를 써서 ‘법우(法友)’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여자신도를 부를 때 ‘보살’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6도 만행을 행하여 부디 보살의 경지에 이르십시오” 하는 축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부처님의 법 테두리 안에서 상하가 없고 귀천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함께 수행·정진을 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부를 때마다 그러한 의지를 다져나가자는 뜻에서 ‘법우’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부르니까 신도들도 처음에는 어색해 하더니 그 취지를 알기 시작한 신도들부터 하나 둘 따라하기 시작하여 현재 상락원에 나오는 신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법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백중기도를 붙여놓은 뒤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또 백중기도를 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를 붙여놓은 신도들의 기도 기간 동안의 행동을 살펴보면 법회 때 절에 나와서 남들이 하는 대로 지장보살 정근을 하면서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지장보살님 우리 영가 왕생극락 시켜주십시오” 하고 발원을 하는데, 그것을 올바른 기도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입문하는 코스로 접하는 경전 중에 ‘초발심자경문’이 있습니다. 그 경의 발심수행장에 보면 ‘自罪(자죄)를 未脫(미탈)하면 他罪(타죄)를 不贖(불속)이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을 한문 뜻풀이대로 해보면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남의 죄를 풀어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 몸이 깨끗하지 못하면 남의 허물을 벗겨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쉬운 내용이지요? 
이 말을 영가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신도의 입장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어떻겠습니까? “본인이 스스로 깨끗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 공덕이 영가에게 올바르게 연관되어 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기도에 임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때부터 스스로 닦고 잘 벗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신도 중에는 마음의 때를 벗기는 수행은 하지 않고 그 결과에만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지극정성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했는데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을 보니, 부처는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영험이라는 것도 없다”고 비토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원망을 부처님께 돌리고 그들은 불교와 등을 돌립니다.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사람들입니까? 
부처님의 가피력은 이 우주에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원을 세워 기도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진언을 하게 되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그 가피력을 내려주십니다. 
비유컨대 심산유곡에서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산유곡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솟아나는 샘물은 시간에 따라서 나오다 안나오다 하지 않습니다. 또 사람에 따라 나오다 안나오다 하지도 않습니다. 누가 오든 말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목마른 자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청정수가 되고 감로수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중생이 미련하고 미혹해서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청정수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력도 심산유곡에서 솟아나는 청정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가득 찬 ‘중생심’이라는 그릇에 부처님의 가피력인 청정수를 담으려고 한다면 담기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심산유곡의 샘물을 찾아가서 아무리 그릇에 물을 퍼 담아도 이미 그릇에 오물이 가득 차있기 때문에 청정수가 들어갈 공간이 없겠지요. 또 오물로 가득 차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릇에 낀 때 때문에 그릇에 담긴 청정수는 금방 탁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그릇을 엎어서 그릇 속에 있는 오물을 쏟아 내야 됩니다. 그리고 그릇을 깨끗이 닦은 다음 샘물을 퍼 보십시오. 담기지 말라고 해도 청정수가 가득 담기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쉬운 이치입니까? 
때가 잔뜩 묻어있는 ‘중생심’이라는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할 생각은 안하고 부처님께 청정수만 하나 가득 담기게 해달라고 빌어본들 부처님의 영험과 가피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과오는 살펴보지 않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부처님의 가피를 받지 못했다”며 ‘무불영험’이라는 말만 내뱉고 도망가 버립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오늘 내 법문과 인연을 맺은 법우님들은 이러한 어리석은 과오를 범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피를 제대로 받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피를 제대로 받는 기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릇에 청정수가 가득 담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릇에 들어있는 오물을 쏟아내고 깨끗이 닦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마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한 ‘참회’의 수행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마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한 참회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참회에는 사참(事懺·부처님의 법식에 따라 몸과 마음을 바쳐 발원하는 참회)과 이참(理懺·죄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이치로 깨닫는 참회)이 있습니다. 즉, 정신적으로 참회하는 것이 있고 육체적으로 참회하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참회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우리 절 신도님들에게 가르치는 참회 방법은 좀 색다릅니다. ‘연령소급법(年齡遡及法) 참회’가 바로 그것인데, 그 참회법을 여기에서 알려드릴 터이니 그대로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 법문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법문입니다. 그러니 잘 배워서 그대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령소급법 참회’가 무엇이냐 하면, 현재의 시점에서 어제의 일을 되돌아보고 반성한 다음 다시 그제의 일을 되돌아보고 자기반성을 해나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또 나아가서 내 나이가 현재 60세라고 한다면 지난해의 일인 59세 때의 나를 되돌아보고 다시 58세, 57세, 56세…, 이렇게 나이를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자기가 그동안 해온 생각과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이 하늘 꼭대기에서 땅 끝까지 다 기만하고 속여도 한 가지 속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양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자들은 자신의 과거 행동은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지장전에 가서 “지장보살님 잘못했습니다. 지장보살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하고 손바닥이 닳고 무릎이 닳도록 참회를 합니다. 자신의 과거 행동과 말 중에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고쳐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참회와 다짐은 하지 않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입으로만 참회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겠지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상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석고나 나무, 철, 동, 돌 등으로 조성한 다음 그 위에 금을 입혀 놓은 것 아닙니까?
이렇게 조성된 부처님 상에 대고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가피를 내려주시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고쳐먹으십시오. 만약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상에 대고 “내가 기도를 하면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상에 영험이 있어서 내 소원을 다 들어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절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그만 두십시오. 
그런 생각과 행동이 바로 미신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앞에서 언급한 ‘무불영험’을 외치며 불교와 등을 돌리고 심지어는 훼불을 하는 사람들로 전락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자기가 참회를 하고 싶으면 지장보살로 조성해놓은 상에 하지 말고 마음속의 지장보살님께 참회를 하십시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불상이 무엇입니까?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상은 단지 부처님의 화상을 그렇게 표현하여 조성해놓은 것이지 그 불상 자체에 영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 상을 조성했다고 해서 그 상에 대자대비의 사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상에 우리가 참배를 하고 예경을 올림으로써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 사상이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수보살 상 앞에 왔을 때는 지혜의 사상이, 보현보살 상 앞에 왔을 때는 이덕(理德)·정덕(定德)·행덕(行德)의 사상이, 대세지보살 상 앞에 왔을 때는 광명과 서원의 사상이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지장전에 와서 참회기도를 하되, “지장보살님 참회합니다”라고만 하지 말고 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길동 지장보살님이시여, 참회합니다”라고 자기 이름을 불러 자기 자손의 지장보살을 찾아서 참회하고 절을 하라 이 말입니다.
지장보살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아비지옥 중생까지도 다 구제를 하여 구제할 중생이 더 이상 없을 때야 비로소 지옥문을 잠그고 성불하겠노라”는 대원력을 세우신 부처님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장보살 상 앞에서 절을 하고 참회를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장보살님이 세운 원력과 사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참회를 한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상을 향해서 절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자기가 원하는 주불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자기의 주불을 찾아라 이 말입니다.
앞에서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우주에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갈무리되어 있는 그 불성을 찾아내서 기도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불성과 우주의 섭리가 하나가 되어 올바른 수행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개안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의 때부터 벗기는 일입니다.
마음의 때를 벗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지장보살님 상에 절을 하고 참회를 하되, 내 마음속에 있는 나의 지장보살님께 해야한다 이 말씀입니다. 지장보살님이 안 계시면 지장경을 놓고 해도 됩니다. 또 관음신앙을 해야겠는데 관세음보살상이 없으면 관음경이나 법화경을 놓고 그 경에다 절을 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허공에다 대고 막무가내로 절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우주에는 선한 에너지와 악한 에너지가 공존해 있습니다. 즉 악한 에너지는 악심이라고 하고 선한 에너지는 선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악한 에너지는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허공에다 대고 자꾸 절을 하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외치면 그 자리에 악신이 붙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그러한 인간들로부터 경배를 받으면서 그 사람을 자기의 노예로 만듭니다. 
미신이 무엇입니까? 귀신을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그 자체로 미신을 논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한 교리와 진리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믿으면 바로 그것이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어렵게 하면 신도들은 그 법문을 들으면서 “아, 그 스님 참 유식하시다”라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법문이 끝나고 나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를 모릅니다. 분명히 좋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으니 머리 속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알아듣지 못한 법문은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도 산 법문이 아닙니다. 죽은 법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쉬운 말로 바꾸어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힘이 여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시고, 내가 지금까지 일러드린 대로 순서에 따라 참회를 해보십시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상단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십시오. 그리고 나서 신중단으로 가서 화상을 내려 제사를 지내십시오. 
이 때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는 시간이 바로 참회의 시간입니다. 참회를 할 때는 앞에서 말씀드린 방법에 따라 참회를 하십시오. 부처님 앞이지만, 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길동 지장보살님이시여, 참회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게 참회만 계속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참회를 했으면 맹세를 해야합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하면서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단으로 내려가서 영가를 천도합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공덕을 7분의 1만 가져갈 수 있다고 했던 영가이지만 얼마를 더 가져갈지는 미지수가 됩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7분의 1보다 더 많은 공덕이 영가에게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법우님들이 영가기도를 할 때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내 것밖에 몰라요. 절에 와서 스님에게 “우리 영가 천도 좀 시켜주십시오”라고 해놓고도 다른 영가와 함께 천도를 하면 싫어해요. ‘우리 영가’라고 동참을 시켜놓고는 “왜 남들과 같이 하느냐”며 실랑이를 벌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너와 나’를 합해야 ‘우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나’를 지칭할 때도 ‘우리’라고 불렀고, ‘내 식구’를 지칭할 때도 ‘우리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가 물들어가면서 ‘우리’라고 하면서도 ‘나’밖에 모르는 사회가 되어버렸어요. 다함께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부처님 말씀에 따라 이야기하지 내가 지어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말 명심해서 들으십시오.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 조상, 내 부모만을 위해서 재를 지내는 사람은 만 개를 얻어갈 데서 하나 밖에 못 가져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조상을 천도할 때에도 유주무주의 영가까지 함께 모셔와 천도기도를 올리면 그 공덕이 나뉘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가된다는 확실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천도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하면 됩니다.
내가 천도할 영가의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길동 영가님과 더불어 모든 영가들을 위해서 이 재를 올립니다. 이 공을 베풉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잊어버리지 말고 반드시 이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법계회향’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눈, 귀, 코, 입, 몸, 뜻으로 지은 모든 죄업을 상단 불공할 때에 참회하십시오. 그리고 절에 오기 전에 집에서도 지장경을 놓고 참회하고 연령소급법으로 찾아들어가면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고, 맹세하고, 그리고 절에 와서 부처님께 참회하고 또 참회하십시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참회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법우님들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또 이렇게 참회를 하십시오.
“제가 미혹해서 죄를 짓고서도 찾아내지 못한 죄, 나로 인해서 남이 지은 죄, 평생 살아오면서 내가 지은 죄를 모두 모두 참회합니다”
이렇게 참회를 하기 시작하면 평생을 해도 모자랍니다. 그러니 참회할 것이 없다는 말은 맞지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누구에게 돈을 빌렸는데, 갚으려고 보니까 이미 죽고 없어서 갚을 길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그 사람의 성명상자를 찾아서 갚을 돈으로 영가천도재를 지극정성으로 지내주면 됩니다. 또는 그 영가의 이름으로 법보시를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때는 그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지은 죄를 다 참회하고 자기의 허물을 벗었을 때 영가천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따라 올해 백중날부터는 영가천도재를 지극정성으로 올려 조상 영가의 천도는 물론 자신이 지은 죄업을 모두 소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불국정토가 되도록 함께 정진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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