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금강사 ‘나비그림’ 대행스님“번데기가 허물을 벗지 못하면 나비가 되지 못한 채 죽어갈 수 밖에 없는 게야. 사람도 탈각의 인연 닿기를 기다리며 지성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볼 수 없는 게고. 나비를 그리는 이유는 번뇌망상을 여의고 나비처럼 자유로운 날갯짓을 펼치고자 하는 소망에 다름 아니지.”나비그림으로 유명한 천안시 금강사 주지 대행스님(한국화가 청석 이재창 화백)은 오는 24일부터 엿새간 천안시민문화회관에서 고희전을 연다. 평생 화두인 나비와 더불어 어느 듯 50여 성상이다. “옛날에는 살기가 어려운 탓인지 뭘 한 가지 해도 죽기살기로들 했는데 지금은 너무들 편해 목숨을 걸지 않아요. 편하기만 하면 진짜가 나오질 않는 법. 수행이든 예술이든 장인이, 도인이 그리운 시절인 걸.”죽자사자 앉아 나비 10마리 그리는 데 1주일이다. 그나마 재물하고는 인연이 없어 그림은 대부분 보시하고 마니, 그 그림 배우겠다고 누가 찾아오는 이도 없다. 괘념치 않는다. 그동안 개인전 3번에 작가전 초대전 그룹전 수차례 전시회는 열었지만 작품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 화단의 평가가 어떤지 도통 오불관언이다. 스님에게 그림은 수행이다. 청색 날개 나비 한 마리가 암갈색 바위를 팔랑팔랑 넘어 날아가자 그리던 붓을 멈추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는 스님의 눈매는 멀리 50여년 전으로 달려간다. 노랑나비 호랑나비 지천으로 날아다니던 봄날. 어릴 적 조치원 고향마을은, 당시 삼천리 금수강산 어느 곳이 아니 그랬겠느냐마는 그야말로 나비로 환희였다. 제비나비, 호랑나비, 신랑나비, 노랑나비...논밭길 따라 봄꽃 속에서 나비가 무수히도 날아올랐다. 그 지천이던 나비가, 우석 김기창 화백을 만나고 나서야 그림 소재가 된다는 걸 알았다. 한때 문학을 꿈꾸던 소년 재창은 우석 문하에 들어가 붓을 들었다. 동네 꼬마들에게 엿을 사주곤 나빌 잡아오라고도 했다. 한지에 나비를 박제하고는 죽어라 따라 그렸다. 날아다니는 나비를 좇으며 크로키도 했다. 우석의 소개로 그 조카뻘 되는 이당 김은호 화백을 만나 서울 인사동을 오르내리며 나비 뿐만 아니라 인물 산수 등을 사사하기도 했다.그러던 중 속병을 얻어 온양의 한 절에 들어간다. “부처님 전 아니면 요절한다고들 하니 별다른 방도가 있나. 다행히 큰스님이 예뻐하셔서 그림 공부는 계속 했는데, 나비? 물론 항상 내 그림 속에는 나비가 날았지.”54년 법난 당시 불한당들의 완력에 환멸을 느끼고는 환속한다. 20여년 나비만이 수행의 도반이었다. 80년대 초부터 나비화백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는다. 1981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했다. 1백여종의 나비를 세밀한 붓터치로 그려낸 극사실적 그림들이 걸렸다. 사람들은 어릴 적 고향마을의 나비떼처럼 모여들었다. 특이한 건 미술전문가보다 곤충학자들이 더 많이 다녀갔다는 사실이다.1990년 당시 총무원장 운재(이영무)스님에게서 다시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하기사 마음으로야 그간 먹물옷을 한차례도 벗은 바 없으니 승속이 불문이다. “나비 안에선 그림과 수행이 둘이 아니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