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오세동자(五世童子)3. 관동(館洞)이야기(2)덕쇠가 부추기자 시습도 지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었다.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보기에는 피가 흘러 흉흉했지만 약간 비릴 뿐 생각보다 고약하진 않았다. 시습은 소의 오장육부를 유심히 살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사람의 장기(臟器)인 간, 심장, 비장, 폐, 신장, 담낭, 소장, 대장, 위, 방광에 배속시켜 외운 적은 있지만 직접 보긴 처음이었다. 덕쇠는 아랑곳 않고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저도 요새 아부지에게 칼질을 배우고 있지요. 칼 가는 것부터 배우는데 요놈 쇠에도 여러 성질이 있어서 구분하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시습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덕쇠가 시습의 갈구하는 눈빛을 보고 두 손을 저었다.“설마...안 되는 구만요. 도련님이 조르고 졸라서 제가 도살간에 남몰래 데려왔는데, 이제 칼까정 탐내면 큰일 납니다. 여기 도련님이 온 걸 식구들이나 학동(學童)들이 안다면 무지하게 경을 칠 거예요. 제가 데려왔다는 것이 들통 나면 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거구만요. 도련님은 붓을 잡고 저는 칼을 잡는 게 도리이지요. 절대 안 됩니다.”35세의 이웃 이계전에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운 시습의 나이가 5살. 이계전은 어린 서거정도 가르치고 있었는데 서거정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항의 매부였다. 그래서 이계전, 최항, 서거정은 당대 최대의 학맥이자 혈연이었다. 김시습은 본의 아니게 당대 최고 학맥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이계전 문하생인 김시습이 간 길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김시습은 당시 시문에 뛰어난 조수(趙須)라는 스승에게도 시문(詩文)을 배우게 되는데, 조수는 뛰어난 문학가면서 성격이 호탕했다. 안평대군이 그에게 <이태백집>을 주자,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이 속에 <이태백집>이 전부 들어 있다’면서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책을 보지 않고 외워서 가르칠 정도여서 세종 20년(1438년)에 최만리, 김빈, 이영서와 함께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예(司藝)직을 맡고 있던 조수는 성균관 근처에 기거하면서 김시습을 공부시켰고, 시습의 총명함에 경탄하여 왕궁 초청에 다리를 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보통 자(字)는 관례(冠禮)라는 성인식을 치를 때 덕망 높은 어른이 지어주는 것인데 조수는 시습이 성인식도 치르기도 전에 서둘러 ‘열경(悅卿)’이라는 자를 내리고 학문에 더욱 힘쓰도록 격려문을 지어주었다. ‘열(悅)’은 ‘불역열호(不亦說乎)’의 ‘열(悅)’자이고 ‘경(卿)’은 임금이 내린 신하의 ‘경(卿)’자 였으니, 장차 임금에게 기쁨이 되는 신하가 되란 의미였다.11살이 된 시습은 성균관 유생들이 읽는 모든 서책을 이미 섭렵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습은 어린이였다. 남들보다 호기심이 왕성하여 방에 갇혀 글 읽기보다 동네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해서 글을 읽다가 몰래 담을 넘기가 일쑤였다. 장난도 극심했다. ‘살구벌레’란 애칭이 붙을 정도로 복숭아를 좋아했던 시습. 마을 과수원에서 복숭아가 익기시작하면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한 번은 길 가운데 함정을 파서 사람을 빠뜨리는 장난을 치다가 그만 말이 빠져 낙마사고가 발생하여 고역을 치른 적도 있었다. 우연히 장터 푸줏간에서 통돼지가 업혀 들어가서 칼로 뼈에서 고기를 도려내는 장면을 보고 덕쇠를 알게 되어 이렇게 도축장에까지 숨어들게 된 것이다. “도리(道理)? 도리라...붓으로 소를 잡지는 못하지 않느냐.”“에이, 도련님도, 어깃장은. 이런걸 뭐 하러 보고 배울라 그라십니까? 천하의 신동 오세동자가 글을 읽어서 나라님께 공을 세우면 되고, 저는 이렇게 소, 돼지 잡는 살생을 해야 하는 일이 제 천직인데요.”“네가 살생을 해서 천한 신분이라면, 전쟁터에 사람 베고 궁궐에서 칼 찬 장수는 뭐라더냐? 살생한 고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 양반들은 또 무엇이더냐? 신분에 귀천이 있지, 일에 무슨 귀천이 있느냐?” “도련님도 참으로 황소고집이요. 뭔 말씀인지는 내가 잘 은 못 알아듣겠지만 우리 아부지가 절대로 승낙하지 않을 겝니다.”도살장에서 왕초는 소 망치잡이다. 우선 소와의 기(氣)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로 담이 커야하고, 정수리를 단번에 내리칠 수 있는 힘과 정교함이 겸비되어야한다. 힘은 장사에다 망치, 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니 비록 신분이 높다고 해도 감히 그에게 시비 붙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왕초의 이권은 막강했다. 그의 칼질에 따라 고기 양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당장 소가죽을 벗기는 칼질만 조금 무디게 조작해도 수구레 살 두어 근이 더 나왔다. 밉보인 가축의 주인은 남들보다 적은 고기를 가져가야했다. 그 외에도 소가죽, 선지, 내장 등의 소 부산물을 팔아서 막대한 이윤과 배급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낮은 신분에 비해 지나친 재력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아직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게 누구여? 아니, 오세동자님 아니십니까요? 이런 곳에 무얼 볼게 있다고 다 납십니까요?”장쇠는 마을 경조사 고기를 대주기 때문에 마을 구석구석 모르는 일이 없었다. “여기 온 거 모친께서 아신다면 종아리가 남아나지가 않으실 텐데요. 어, 한 입 하셨나보네? 허허, 참. 탁배기를 곁들여야 제 맛인데 한잔 올릴 깝쇼?”시습은 얼른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장쇠는 껄껄 웃으며 줄에 묵은 천엽(소의 위)을 어깨에 걸치고 어딘가로 향했다.“아부지, 어디 가셔요?” “고기 대주러 윗마을 간다.”장쇠는 기생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상것이 감히 사대부들이 드나드는 기방 문턱을 엿볼 수는 없었지만 고기를 대준다는 명분으로 내 집 드나들듯 했다. 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쩨쩨한 사대부들 보다는 훨씬 많은 화대를 기생들에게 뿌리고 다녔고 입만 살아있는 유생들과 달랐기에 튼실한 허벅지와 떡 벌어진 어깨의 장쇠는 기생들에게 특별히 인기였다. 수구레 살을 떼어낸 소가죽이 켜켜이 쌓이고 굵은 소금이 뿌려졌다. 절여진 소가죽은 어느 정도 마르는 데로 가죽신과 장신구를 만드는 갖바치에게 넘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