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조용히 되돌아보다(회광반조,回光返照)2. 시중삼세(時中三世)“글이라, 문장(文章)이라....껄껄껄.”매월당은 억센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요즘 선비들에게 문장은 벼슬이요. 출세를 위해 글을 읽고 출세를 위해 문장을 짓지요. 허나 본래 문장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요. 즉,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을 입신이라 하오. 마음이라는 놈은 본래 보이지도 않고 오고 가는 길도 따로 없으니 스스로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알기 어렵소. 그때그때 심경을 기록하여 나중에 시간을 두고 확인하면 눈 위의 발자국처럼 마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소. 그 흔적을 방향 삼아 자기 몸이 갈 길을 정하는 게요. 또한 성현들의 문장과 비교하여 과부족을 가늠하여 등불 삼아 정진하는 게지요. 양명이란 입신한 깊이만큼 자연히 널리 퍼지는 게요. 꽃이 피면 저절로 향기가 나고 향기가 나면 벌, 나비가 스스로 찾아오지 않소. 그런데 점차 입신은 없고 양명만 너도나도 잡으려하니 참으로 딱한 세태지요. 남의 문장만 구관조처럼 외워서 자기 마음의 깊이 인양 착각하는 게지요.”“문장의 깊이로 치자면 근세 들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시잖습니까. 그런데도 왜 양명을 마다하셨는지요.”“허허, 늙은이에게 작정을 하셨구먼. 그럼 내 변명을 좀 하리다. 나에게 문장은 낡은 짚신이요. 신다가 닳으면 버리고 새 놈으로 바꿔 신소. 짚신만 보고 짚신을 신은 사람을 평한다면, 거울을 보면서 어제 거울 속의 사람은 어데 갔느냐고 거울에게 떼쓰는 바와 다를 바 없소. ‘봄’이라고 쓴 문장을 가을에 펴도 역시 ‘봄’이지 않소.”중년의 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월당은 한 구석에서 물그릇을 찾아 마른입을 축였다. “가을에도 여전히 봄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문장’에 본래 그 내용이 없기 때문이요. 대웅전의 비로자나불을 본적이 있지요. 한 손으로 반대 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지 않소. 감싸 쥔 검지가 보이지 않아도 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뭐 그런 거요. 도(道)란 아무 형상도 없소. 안 보이는 검지가 도라면 감싸 쥔 손이 문장이요. 보이지 않는 도를 알리기 위해서 잠시 보이게 감싼 것이 문장이요. 김정승 문패를 떼어다가 오첨지 문간에 붙인다고 김정승이 오첨지가 되진 않지요. 보이지 않는 도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문장만 쫒는 형국은 문패만 따르는 한심한 작태와 다를 바 없지 않겠소. 이런 인물을 일러 보이는 맹인이라 부르오. 문장이란 이렇게 허상일 뿐인데 어찌 헤진 짚신 같은 문장을 팔아 벼슬을 살 수 있겠소. 처음엔 나도 남들처럼 양명의 수단으로 발을 들어놓으려 한 적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따르는 자들과 도저히 마음을 틀수 없더이다. 메마른 산천에서라도 마음 통하는 도반들과 어울려 흥을 즐기는 안주로 문장이 오르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었다오.”매월당은 몇 번 잔기침을 했다.“내 문장은 여러 경로를 거쳤소. 소싯적에는 성현들의 문장을 흉내 내기도 했고, 양명을 숭상하기도 했고, 수양대군 이후 팔도를 유랑하며 토해 낸 울분의 찌꺼기이기도 했고, 점차 문장이란 놈이 내 혼과 대화하는 서찰이 되었소. 고독할 때 유일한 벗이오.”매월당이 그제야 생각난 듯 한구석에서 한지 뭉치를 꺼냈다. 얼마 전 그린 자화상을 펼쳤다.“요것이 가장 최근 내 문장인데, 이 초상이 정말 한평생 쓰고 새긴 내 삶의 최종 문장이요. 그 옆에 글이 초상에 대한 나의 술회 이구요.”술회는 이렇게 쓰여 있다.‘이하(李賀:당나라의 천재시인)를 깔아 볼 만큼 해동(海東)에서 최고라고들 하지만 과찬의 명성이요. 부질없는 명예가 어찌 내게 해당되리오.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하는 말은 당돌하기 짝이 없으니, 마땅히 너를 구덩이 속에 내버릴지어다.’ 좌중은 한 바탕 호탕한 웃음이 휩쓸었다. 호롱불이 가물가물 흔들렸다.“초상(肖像)에 대한 감상은 겉치레가 아니오. 초년의 생각이 중년에 뒤집히고, 말년에 보니 또 중반의 생각이 터부니 없더이다. 그래서 한때 묵언(黙言)을 고집한 적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전생의 업보를 알고부터는 이내 포기했소. 쓸데없는 일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알고 하는 순간부터 쓸데없는 일이 아니지 않소. 시중(時中)에는 전후좌우 부귀빈천이 없이 오직 정성만 있으니까......”처사는 어렵다는 듯 가는 숨을 내뱉었다. 그런 처사의 마음을 헤아린 듯 매월당이 설명을 붙였다.“시대의 상도(常道)를 지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시중(時中)이오. 논에 가면 농부가 되고 산중에 가면 사냥꾼이 되듯이, 한 가지 말에 매어있지 않고 그때그때 시기에 맞추는 도리요. 유불선(儒彿仙)의 모든 도리가 여기에 담겨 있소. 유문(儒門)에 중용(中庸)이 있지만 분명 시중(時中)과는 다르오.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모두 통해야 비로소 진중한 시중이 될 수 있소. 이것은 우물의 깊이에 따라 우물의 중심이 달라지는 바와 같소. 중용은 유문에서 하는 습관대로 현세만 치우쳐져 있소. 그래서 충(忠)이란 이름으로 시류에 거리낌 없이 권좌에 야합해도 부끄럼을 모르는 것이오. 나도 이점에서 많이 갈팡질팡했소. 드러난 것을 아무리 합산하여 중용을 구해보아야 소용이 없었소. 그래서 불문(佛門)에서는 일찍부터 삼세의 인과응보를 가르쳐온 것 아니겠소. 그런데 지금의 불문 또한 시중하지 못하고 있소. 경(經)만 암송한다고 되는 게 아니요. 선(禪)을 통해 진정으로 자기 혼이 삼세를 꿰뚫어야만하오. 헌데 사서삼경과 다를 바 없는 공안(公案)에만 골몰하거나 호흡 양생술(養生術)로만 일관하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이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에서 황공무지한 망발이지만, 불경에는 부처님이 없소. 부처님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 했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진정한 자신만의 경이오. 불경은 경을 엮었던 사람들의 각자 소견일 뿐이오. 구관조처럼 밤낮 염불해봐야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오. 스스로 삼세를 오가지 못하니 승려들이 사실상 산속에서 백성으로부터 현실 도피하는 구실로 윤회(輪廻)를 오남용하고 있소. 그런 면에서 불문은 슬그머니 선문(仙門)에 귀의하는 꼴이 되었소. 게다가 중생들로부터 시주 받는 호구지책을 당연시하고 있소. 백성들에게 빌어먹는 과보가 무엇인지 왜 공안으로 삼지 않는 거요. 승려가 무슨 벼슬이란 말인가. 불자들에게 떳떳해야 진정으로 승려로서 첫발임을 알아야하오. 시중은 개인으로선 자기 인생, 국가로선 깊은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되면, 변하는 본성과 시시각각 변하는 오행을 구별하지 못하고, 마침내 눈앞의 명리만 쫓게 될 뿐이오.”매월당은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 공연히 옆에 있던 붓과 벼루를 정리해서 윗목에 밀어두었다. 매월당은 마치 잠시 동안 한 생을 모두 되돌아보는 듯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먼 곳을 응시했다. “사육신을 참배할 때 만해도 내 울분은 남의 탓에서 왔소. 하지만 내 인과를 따져 본 후부터는 남을 욕해도 내 탓이 되더이다.....참 그동안 우둔했소. 문패를 쫒아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르오.”“전생을 보셨습니까? 어느 분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긴 장마철 장대비는 피할 수 있어도 업보는 바늘 끝만큼도 오차가 없더이다. 나는 영안(靈眼)을 뜨지 못해 보지는 못했소. 다만 내 지난날 서필(書筆)과 육필(肉筆)로 더듬다가 알게 되었소. 졸저 ‘금오신화’로 남의 넋을 기리는 과정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깊은 회한을 느꼈지요. 내 문장은 평소 내 처지를 읊고 돌아보는 거울이었는데, 결국 남겨진 문장은 후세의 나를 볼아 보기위한 거울이 되더이다. 처사님에게는 ‘누구’보다는 ‘어떤 과보’인지가 더 귀감이 될게요.” 매월당은 양해를 구하고 비스듬히 눕는다. 무량사위에 빛나는 초롱초롱한 월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천장을 응시한다.(김영수.www.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