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종선 활개 속 남종 깃발 우뚝 세워"북종선(北宗禪)의 선승(禪僧)들이 제도불교(帝都佛敎)를 주도해 나가는 세력으로 부상하여 활발하게 교화를 전개해 나가고 있을 때 새로운 보리달마남종(菩提達摩南宗)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사람이 하택신회이다. 북종선의 개념과 반대가 된다는 의미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선언하고 일어선 신회는 자신들이 보리달마의 종지를 이은 전통적 선맥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도심을 장악한 북종선에 대항해서 지방에서 일어선 신회이기 때문에 신수계(神秀系)의 북종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다. 북종선을 공격하면서 일어선 신회는 한 때 옥천사(玉泉寺) 신수(神秀)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운사를 떠나 육조 혜능(慧能:638~713)의 적사(嫡嗣)의 지위를 얻은 신회는 활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여 종론(宗論)을 제기하고 신수계의 북종선이 방계(傍系)임을 선전했다. 신회는 활대의 무차대회를 통해 조계혜능(曹溪慧能)이 보리달마남종(菩提達摩南宗)의 정법(正法)을 이은 조사(祖師)임을 천명했다. 무차대회에 동참한 도학자들을 상대로한 신회의 문제제기는 중국선종(中國禪宗)에 있어서 남종(南宗)이라는 명확한 종명(宗名)을 최초로 천명한 계기를 만들었다.남종(南宗)의 독립을 선언한 활대의 종론은 초기선종(初期禪宗)이 갖추고 있던 유지를 크게 전환하게 되는 전기를 가져왔다.활대(滑臺)는 하남성활현(河南省滑縣)의 백마성(白馬城)으로서 대운사(大雲寺)는 측천무후가 무주혁명(武周革命)을 기념하여 설치한 관사(官寺)의 하나였다. 신회가 본격적으로 북종을 공격하게 된 계기는 <활대의 종론>이었지만 신회의 북종선 비판은 남양(南陽) 용흥사(龍興寺)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북종(北宗)의 선사상(禪思想)을 요약한 의심입정(擬心入定), 주심간정(住心看淨), 기심외조(起心外照), 섭심내증(攝心內證) 4구의 격언은 이미 신회의 남양 용흥사시절의 어록 남양화상돈교해탈선문직료성단어(南陽和尙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에 기재되어 있다.많은 선사들이 선정을 닦아 선정을 얻은 후에 지혜가 발현되도록 해야한다고 했지만, 신회는 선정과 지혜가 함께 한다고 주장했다. 선정이 많고 지혜가 적으면 무명(無明)을 증장(增長)하고, 지혜가 많고 선정이 적으면 사견(邪見)을 증장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선정과 지혜가 동등할 때 불성(佛性)을 본다>고 말했다. 선정(禪定)이라는 것도 그 본질(體)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지혜라는 것도 불가득한 본질이 항상 적정(寂靜)하여 항하사(恒河沙)와 같이 많은 작용이 있음을 분명히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택신회(何澤神會: 684~758)선사의 속성은 고(高)이며 양양(襄陽) 사람이다. 유가의 오경(五經)에 능통하고 이해가 깊었으며, 노장학(老莊學)에도 조예를 가졌다.정상(頂相)은 범인(凡人)과 다르고 마치 공구(孔丘)와 같았으며 골격과 기상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았다. 그의 총명과 변재는 측량하기 어려웠으며 성인(聖人)의 골상을 타고난 이인(異人)이었다. <후한서>를 읽고 불교에 귀의했다.고향의 국창사(國昌寺) 호원(顥元)선사에게 몸을 의탁했다. 불가에 들어온 후 제방을 주유하며 선지식을 참방했다. 많은 선지식을 찾아 열반본적(涅槃本寂)의 본지를 물었다. 옥천사 신수에게서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신수가 국사가 되어 옥천사를 떠나 낙양으로 옮긴 다음 조계 혜능의 문하에 들었다.조계의 돈오종지(頓悟宗旨)는 한 때 훼멸될 위기에 처했다. 신수계의 점수문(漸修門)이 흥함으로 인해 정법이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신회는 위기에 직면하여 사종(邪宗)을 파하고 돈교법(頓敎法)을 굳건하게 세우고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했다. 천하의 도학자들에게 종지를 정(定)하고, 시비(是非)를 가려 북종 신수계의 선을 명쾌하게 천명했다. 신회는 거침없이 신수계의 선을 항하여 사승시방(師承是傍:사승은 방계)이요, 법문시점(法門是漸:법문은 점수)이라 갈파했다. 목숨을 건 활대(滑臺)의 종론(宗論)을 통해 사종((邪宗)과 돈교(頓敎)의 시비를 가리지 않았더라면 육조(六祖)의 조도(調度)는 사해를 넘보기 어려웠을 것이다.활대(滑臺)의 종론(宗論)을 통한 신회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육조 혜능의 존재는 미미하게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돈교의 종론을 굳건하게 세운 신회였으나 혜능이 천화한 후 남종(돈교)의 정통 다툼 과정에서 하택종을 제치고 홍주종이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신회의 행적이 퇴색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돈교의 정통을 차지한 홍주종의 여러 종장들에 의해서 신회의 전적이 사실과 달리 각색되어지고 덧칠되어졌다는 것이다.20세기 초 돈황에서 발견된 신회의 유작들은 우리가 그동안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다. 우리가 그동안 관점을 달리하는 종파적 색안경을 끼고 선종사(禪宗史)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 허상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는 온당한 객관적 관점을 통해 거대한 종장(宗匠)과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일부 학자들은 신회가 육조현창운동을 한 까닭은 선종의 칠조(七祖)가 되고자 함에 있다고 언급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신회라는 인물의 진상을 모른채 그의 사상을 왜곡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회는 사상적으로 유불도(儒佛道)에 정통하였다. 심오한 선지(禪旨)를 터득하여 돈오선 사상을 선양했으며, 파토스적인 열정으로 보살로서의 삶을 살았던 대선사다. 정법을 소멸시키고, 명리를 다투는’ 북종선의 일부 삿된 무리들을 향해 “사종(邪宗)을 파하고 돈교법(頓敎法)을 세우기” 위해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해 북종을 공격한 것이다.돈황본 <단경>에는 신회는 혜능 문하에 투신하여 사미로서 불성문제로 혜능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회는 혜능의 임종시에 선(善)과 불선(不善)에 흔들림 없는 경지를 내보임으로써 육조의 인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신회는 정통 사법(嗣法)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육조로부터 인가와 부촉을 받고 혜능 문하의 상수(십대제자)가 되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로 북종의 점수선을 파하고 돈오선 운동과 육조현창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신회는 남종 돈오선의 지위를 반석같이 든든하게 세웠으며, 스승인 혜능을 선종의 정통 육조로 옹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혜능이 주장한 돈오선의 이론적 보충을 증장하여 돈오선의 사상적 본령과 외연을 넓히는데 공헌했다.1930년 중국의 철학자 호적(胡適)이 <신회화상유집>을 발표하기 이전까지만해도 선종의 종문에서 신회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선종의 대종사인 하택신회(荷澤神會)를 가리켜 지해종사라고 칭했다. 이것이야말로 종파주의의 틀 속에서 가장 우수한 선사를 지해종사(知解宗師)라는 오명으로 폄훼하여 신회의 사상과 인격을 폄훼했다. 신회의 신명을 바친 육조현창(六祖顯彰)이 없었던들 육조 혜능의 지위는 오늘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호적은 신회를 가리켜 중국 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사요, 사상가요, 혁명가라고 칭송했다. 호적의 언급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보다 깊은 시각으로 신회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태도를 취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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