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을 통한 수행과 교화 환암혼수가 본격적으로 사사한 최초의 인물은 강화도 선원사의 식영암(息影菴) 스님이다. 강화도 선원사는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였던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가 강화도로 천도한 지 14년이 되는 1246년에 창건한 사찰이다.초대 주지는 진명국사 혼원(混元)으로 200여 명의 승려과 함께 주석하였다. 혼원선사는 보조지눌의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조계산 수선사에서 수행하던 인물로서 수선사 제4대 주지였으며, 아울러 선원사 제2대 주지인 천영(天英)은 수선사 제5대 주지였다. 일찍이 수선사 제2대 주지 진각국사 혜심때부터는 수선사가 중앙의 정치서력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원사에서 1324에 주지로 있던 식영암(息影菴, 息影鑑, 息影淵鑑)에게 환암혼수(1320-1392)가 참하여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수를 터득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식영암은 선원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 몇 해 전에 소실된 비로전(毘盧殿)을 중건하고서 제자인 전인(全忍)에게 돈을 주어 송나라에 가서 비로전의 단청을 위한 채색재료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325년에 비로전을 단청하고 그 동편 벽과 서편 벽에 40 신중상을 그려넣었다. 단청을 마치고나서 식영암은 몸소 ?선원사비로전단청기(禪源寺毘盧殿丹靑記)?를 지었는데 그것이'동문선' 권65에 수록되어 있다. 식영암 스님은 또한 일찍이 선원사의 중건을 발원하는 소(疏)를 지어올려 선원사를 크게 중수하기도 하였다. 식영암 스님은 이색이 쓴 행촌(杏村) 이암(李? : 1297-1364)의 비문에는 이암이 선원사의 식영암 스님과 더불어 방외(方外)의 도반이 되어 절의 경내에 건물을 짓고 편액을 해운(海雲)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식영암은 널리 사대부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널리 도속을 교화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에 경륜이 깊은 식영암에게 참문한 환암혼수는 식영암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워 그 심오한 뜻을 터득하고 그에 따라 수행하였다. '능엄경'의 수행법은 예로부터 중국을 비롯하여 고려초기부터 널리 중시되던 경전이었다. 일찍이 나말여초에 선법이 전래되면서 소위 구산문을 비롯한 많은 선풍이 점차 기반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였다. 천태종의 개창과 더불어 이에 자극받아 선종계통에서도 기존 산문의 성격을 벗어나 하나의 종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고려 무인정권 시대와 함께 보조지눌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적인 선사상의 정립과 더불어 새로운 결사운동을 통한 선종의 기반을 탄탄하게 구축하였다. 나아가서 지눌에 의한 송대의 간화선의 강조는 진각혜심에 이르러 본격적인 간화선 위주의 선풍을 진작하게 되었다. 이런 즈음에 약간 앞서 점차 일반화되고 보편화되어가는 선법은 일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귀족계층에서도 교학불교와 더불어 수양과목으로서 선수행은 필수적인 교양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려 중기의 선법은 소위 거사선이라는 일군의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거사선의 한가운데는 이자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자현은 당시 가지산문의 계승자였던 학일(學一 : 1052~1144) 및 탄연(坦然 : 1070~1159)을 비롯한 당시의 선승들과 교유하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선풍을 다져 나아갔다. 그것은 능엄경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능엄선의 흥기와 송대선종의 영향으로 수입된 간화선의 등장이었다. 더욱이 금강경을 애독해여 금강거사로 불리우웠던 이오(1050~1110)를 비롯하여 설당거사(雪堂居士)라 불리웠던 김부식(金富軾 : 1075~1151)과 그의 동생인 김부철(金富轍) 등은 그 선구적인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특히 이자현(李資玄 : 1061~1125)은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청평산 문수원에 은거하면서 참선과 경전의 공부로 일관하였다. 이자현은 일찍이 설봉의존(雪峯義存)의 어록인 '설봉어록(雪峰語錄)'을 읽다가 그 가운데에 ‘온 우주법계가 그대로 모두가 눈인데 그대는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있겠는가’ 하는 부분에 이르러 크게 깨침을 경험하였다. 이후로 운문문언의 어록 등 여러 가지 어록과 경전을 즐겨 애독하였다. 경전 가운데는 특히 능엄경을 중시하여 그 제자들에게도 널리 권장하였다. 이자현은 능엄경의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근(根)·식(識) 등 칠대오입(七大悟入)을 통한 망념의 타파를 중시하여 그것을 통한 깨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일체 존재가 여래장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내용에도 깊이 탐구하였다.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으로는 25가지 원통을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관음보살이 수행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은 이자현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그 이근원통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으로서 소위 듣고 있는 자신의 성품을 다시 돌이켜 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근원통이란 25성인이 각기 자신이 깨친 원통방편을 설명하자 부처님은 문수에게 그 시비를 가려보라고 말한다. 이에 문수는 차례로 25성인의 견해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관세음의 이근원통이야말로 최상의 방편임을 찬탄한다. 25원통은 6진과 6근과 6식과 7대가 원통한 것을 말한다. 좌선의 수행으로 보편적으로 의용된 25가지 원통수행은 다음과 같다. 먼저 육진오입(六塵悟入)은 다음과 같다.성진오입(聲塵悟入)은 교진여가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사성제를 깨친 것이고, 색진오입(色塵悟入)은 우파니샤타 곧 진성(塵性)이라는 수행자가 부정관을 관찰하여 무학도를 성취하는 것이며, 향진오입(香塵悟入)은 향엄동자가 두루 유위(有爲)를 관하다가 침수향이 타는 냄새를 통하여 무루지를 얻은 것이고, 미진오입(味塵悟入)은 약왕과 약상이 약초의 맛을 통하여 보살지를 얻은 것이며, 촉진오입(觸塵悟入)은 발타파라 곧 현호(賢護)가 때를 씻는 물을 통하여 무소유경지를 얻은 것이고, 법진오입(法塵悟入)은 마하가섭과 자금광 비구니 등이 육진이 모두 공적(空寂)한 줄을 터득하여 멸진정을 얻은 것이다. 또한 육근오입(六根悟入)은 다음과 같다.안근오입(眼根悟入)은 아나율다 곧 무빈(無貧)이 낙견조명(樂見照明)의 금강삼매를 통하여 얻은 지혜이고, 비근오입(鼻根悟入)은 주리반특가 곧 계도(繼道)가 출입식을 통하여 무학위(無學位)를 얻은 것이며, 설근오입(舌根悟入)은 교범바제 곧 우가(牛呵)가 혀를 통하여 무학위를 얻은 것이고, 신근오입(身根悟入)은 필릉가바차 곧 여습(餘習)이 촉각을 통하여 무학위를 얻은 것이며, 의근오입(意根悟入)은 수보리 곧 공생(空生)이 공성(空性)을 통하여 무학위를 얻은 것이다. 또한 육식오입(六識悟入)은 다음과 같다.안식오입(眼識悟入)은 사리불이 심견(心見)을 통하여 아라한을 얻은 것이고, 이식오입(耳識悟入)은 보현보살이 심문(心聞)을 통하여 지혜를 터득한 것이며, 비식오입(鼻識悟入)은 손타라난타가 출입식을 통하여 수기(受記)를 받은 것이고, 설식오입(舌識悟入)은 부루나미다라니자가 대변재(大辯才)의 음성을 통하여 아라한을 얻은 것이며, 신식오입(身識悟入)은 우파리가 청정계율을 통하여 아라한을 얻은 것이고, 의식오입(意識悟入)은 대목건련이 신통력을 통하여 아라한을 얻은 것이다. 또한 칠대오입(七大悟入)은 다음과 같다.화대오입(火大悟入)은 오추슬마 곧 화두(火頭)가 화광삼매를 통하여 아라한을 얻은 것이고, 지대오입(地大悟入)은 지지보살이 비사사불을 위하여 땅을 평탄하게 한 수행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것이며, 수대오입(水大悟入)은 월광동자 곧 수천(水天)이 수성관법(水性觀法)을 통하여 동진(童眞)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고, 풍대오입(風大悟入)은 유리광보살 곧 무량성(無量聲)이 시공(時空)을 관찰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것이며, 공대오입(空大悟入)은 허공장보살이 정광불(定光佛)의 처소에서 무변신(無邊身)을 통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것이고, 식대오입(識大悟入)은 미륵보살 곧 자씨(慈氏)가 식심삼매(識心三昧)를 통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것이며, 근대오입(根大悟入 혹 見大悟入)은 대세지 법왕자 곧 무량광(無量光)이 육근을 통하여 삼매를 터득하는 것이다. 25가지 수행 가운데 마지막으로 언급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구체적인 수행은 다음과 같다.대중과 아난이여, 그대들이 전도하여 듣는 바탕을 돌이켜서 듣는 자성을 되돌이켜 듣는다면 그 성품은 최상의 도를 이루게 될 것이니 원통의 진실이 그와 같다. 이것이 바로 미진불(微塵佛)이 열반에 들어간 하나의 길이었다. 과거이 모든 여래도 이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수행으로 여래를 성취하였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자 원명(圓明)한 수행문에 들어가며 미래의 수행자들도 마땅히 이 수행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나도 이 수행법에 의지하였듯이 관세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처럼 능엄경의 경문에서도 이근원통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육근오입 가운데서 이근오입(耳根悟入)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경전을 따로 할애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중생의 육근 가운데 이근방편(耳根方便)이 가장 수승함을 말하여 관세음보살이 원통대사(圓通大士)라 불리웠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만하다.이자현은 바로 이 25원통의 하나하나에 대하여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몸소 깨침을 맛보고서 그에 대하여 크게 확신을 지녔다. 이리하여 스스로 능엄경에 근거하여 스스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이게도 또한 선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능엄경과 그 수행법을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입적하는 날까지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특히 왕명을 받들어 행한 능엄경 법회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구분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능엄경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능엄경이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경전으로서 그 권위를 확보하게 된 것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이후로 간주된다. 의천은 1085에 입송하여 화엄종의 대가인 정원(淨源)을 만났다고 한다. 송대 화엄경과 반야경과 능엄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기에 능엄대사(楞嚴大師)라 불리웠던 장수자선(長水子璿)에게서 능엄경을 배운 정원은 능엄경에 대하여 주석서를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이로써 능엄경의 위상이 부각되면서 의천은 그 주석서까지도 널리 수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으로서 능엄경은 귀족계층 및 식자층으로터 크게 호응을 얻을 수가 있었다. 특히 능엄경이 지니고 있는 구성의 치밀함과 바른 수행으로부터 나타나는 경지 및 잘못된 수행으로부터 나타나는 선병(禪病)과 그 퇴치방법 등은 어느 경전 못지않게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지침서로서 능엄경은 선사들뿐만 아니라 교학승려 및 사대부 계층에서 넓게 의용되어 사상적인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또한 구체적인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에서 제기된 문성(聞性)과 견성(見性)의 문제는 조금이라도 수행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매력있는 내용이기도 하였다. 곧 견성은 망심(妄心)을 타파하고 깨침을 얻어가는 입장과 반대로 진심(眞心)을 일깨워 확대해 나아가는 입장은 법계 모두가 그대로 깨침의 완성이라는 송대 조사선의 전개와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반 중생들에게는 널리 일체 존재가 여래장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수용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불성 및 여래장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제시하고 있는 능엄경의 입장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지남(指南)이었다. 이자현은 이와 같은 능엄경 사상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을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에서 문수원이라는 가람형태속에 그대로 구현해 두었다. 그리고 스스로 문수원의 구조를 통하여 늘 수행과 깨침과 그 보급에 널리 힘썼다. 이후에 이자현의 이와 같은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로는 혜조국사 담진과 대감국사 탄연 및 권적(權適 : 1094~1146) 등이 있었다. 이처럼 '능엄경'을 바탕으로 한 수행은 당시 귀족계급 및 식자층에서는 교양을 갖추는데 있어 필독서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선종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일반과 신유학에서도 정신수양을 위한 방법으로 중국의 송, 원, 명, 청대 및 우리나라의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도록 지속되고 있다. 식영암은 자신이 더불어 교유(交遊)했던 사대부 및 식자층은 물론이고 그 제자들에게도 항상 '능엄경'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입참한 환암혼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서 환암혼수의 행장에서 보았듯이 식영암으로부터 비롯된 '능엄경'을 통한 수행과 교화는 혼수의 일생에서 초기시대부터 수행으로 삼으면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교화의 방편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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