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아를 찾으려고 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자신이 자비심으로부터 여기에 온 여래(如來)이기 때문에 본래 자기가 지니고 왔던 밝은 빛을 찬란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선을 하는 것이다.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전환하며 가장 순수한 자기존재의 시간을 향유(享有)하고자 선을 한다.
바람소리를 바르게 듣고 흐르는 물소리를 올바로 들을 수 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 온다. 순간 순간을 숨쉬며 자기의 내면에 간직한 광명을 들어내고자 묵묵히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을 때 기쁨이 밀려 온다. 이때에 비로소 자신의 뇌로부터 8헤르츠의 알파파 뇌파가 양산되어 드넓은 우주 공간으로 번져 나간다.
선을 하려면 우선 앉아야 한다. 앉지 못하고 서서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 묵연정좌를 통해서 사유를 깊게 해야 한다. 신(身) 구(口) 의(意)를 <고정된 시간과 공간>에 묶어 두어야 한다. 생명의 창발성에 따라서 몸과 입과 뜻이 변화를 모색하게 되면 변화의 양상을 보고자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이 돌아올 수 없다.
선은 몸/입/뜻이 움직일 수 없도록 압축된 시간과 공간에 정지시킨다. 몸/입/뜻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행동하는 과정을 정지시킨다. 범사를 병행해 나가는 시간 공간에서는 전도된 망상에 시선이 집중되어 진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선이 외경을 향해 뻗어나가는 마당이라면 묵연정좌는 파기되고 만다. 혼은 빠져나가 없는 육체덩어리만이 앉아 있고서는 묵연정좌라고 할 수 없다.
몸/입/뜻이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질서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몸/입/뜻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사(祖師)들의 관점이다. 조사들은 인간의 몸/입/뜻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선이 묵연정좌를 방법으로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몸/입/뜻을 통해 더이상 나쁜 업을 쌓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거목이 되도록 하려면 지엽을 정리하는 것처럼, 생각도 역시 거대한 생각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잡다한 생각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하나의 생각을 북돋아줘야 하기 때문에 화두(話頭)만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남겨두고 다른 생각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은 <화두>를 키우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화두를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게 육성하는 것이다. 작은 마음이 아니라 큰마음이 되도록 마음을 육성시키는 것이다.
물리실증주의나 논리실증주의를 선호하는 현대인들은 몸/입/뜻을 움직일 수 없도록 하는 묵연정좌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발전주의를 높이 들고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착취하여 무엇인가 소득을 취함으로써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이론을 목에 걸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묵연정좌>를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은 묵연정좌를 통해서 몸/입/뜻을 움직일 수 없도록 한다. 연후에 다시 또 차원을 달리하여 묵연정좌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부정한다. 존재의 실상을 부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눈/귀/코/입/몸/뜻을 부정한다. 이와 같은 부정의 모습은 해체주의와 흡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체주의는 결코 아니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절대적 긍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선가의 법통이다.
선문에 들어서면 속된 눈의 수준을 정화하여 고귀한 것을 볼 수 있도록 재정립한다. 목전의 물질의 형태를 목격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무색(형태 없음)을 주지시킨다. 그와 동시에 고귀한 사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전환시킨다. 눈의 수준을 높이고자 눈을 정화한다는 의미는 단순하게 목전의 사물만을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 문화와 역사를 통시적(通時的) 전관적(全觀的) 관점에서 폭넓게 살필 수 있는 눈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부처님의 눈과 같은 눈으로 승화시킨다는 뜻이다.
새로운 관점을 갖도록 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무안(無眼:눈 없음)을 강조한다. 좋지 않은 괴담이나 속설을 듣게 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치심을 없애기 위해서 고귀한 음향을 들을 수 있는 귀로 전환한다. 그러기 위해서 역시 무이(無耳:귀 없음)를 강조한다. 향기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코를 갖추기 위해서 코의 수준을 전환한다. 저급한 현재의 코를 없애고자 무비(無鼻:코 없음)를 주장한다. 아름다운 사상을 말할 수 있는 입을 만들기 위해서 입의 수준을 전환한다. 입의 수준을 부처님의 입과 같이 하고자 현재의 입을 부정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설(無舌:혀 없음)을 주장한다.
무안(無眼:눈 없음) 무이(無耳:귀 없음) 무비(無鼻:코 없음) 무설(無舌:혀 없음)을 외치는 까닭은 현재의 눈/귀/코/입의 수준을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눈/귀/코/입,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눈/귀/코/입과 같이 만들고자 하는 방법이다. 무안이비설(無眼耳鼻舌)을 외치는 까닭은 현재의 눈/귀/코/입을 가지고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눈/귀/코/입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에 뜻이 있다. 자신의 저급한 눈/귀/코/입을 부처님의 눈/귀/코/입과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키고자 하여 무안이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안이비설을 없다고 하는 이유를 납득해야 한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온갖 사물/소리/맛/언어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와 같은 오해로부터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발생한다. 불교는 허무주의가 결코 아니다.
남은 문제는 몸과 뜻이다. 육체(肉體)와 의식(意識)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묵연정좌를 통해 눈/귀/코/입은 조복을 받기가 쉽지만 <육체>와 <의식>은 좀처럼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오랜 습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정좌를 계속하면 어느 정도의 조복을 받을 수 있지만 의식은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다. 의식은 육체를 떠나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묵연정좌를 계속해도 의식을 붙잡아서 불태워 버리기 어렵다. 잡을 수 없는 의식이기 때문에 불태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도 6년이나 걸렸다.
선가(禪家)에서 묵연정좌를 통해 자기가 지니고 있는 현재의 눈/귀/코/입/몸/뜻을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까닭은 나가르주나의 <반야공관般若空觀>과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스님 불교>보다 <신도 불교>와 <보살 불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대승불교운동가(大乘佛敎運動家)인 나가르주나는 <반야공관>과 <반야사상>을 매우 중시했다. 반야공관과 반야사상이 담긴 텍스트는 <반야심경>이다. 묵연정좌를 실현하는 선가에서 반야공관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반야사상>과 <선>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선가(禪家)에서 선(禪)을 실행하는 선객(禪客)들이 <반야공관>을 중요시하여 현재의 눈/귀/코/입/몸/뜻을 불태워 버리려고 하는 이유는 초기선종(初期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반야공관>에 의지하여 벽관(壁觀)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달마대사가 벽관에 전력을 기울인 것을 보면 나가르주나의 관점과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의 전제명제는 도입부에 명시되어 있다.
모든 형태와 일어나는 느낌, 생각, 행위, 의식이 모두 우주의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성과 자연의 만물에 내재된 만물조화의 창조적 율동의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야 비로소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 형태와 느낌, 생각, 행위, 의식이 모두 우주 자연과 개체간의 조화로부터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된다는 명제이다.
달마대사의 혈맥론 역시 우주와 자연의 화합에 동참하고자 탐욕과 성냄과 치심을 금기로 한다. 그래서 모든 행위를 규제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보원행(報怨行: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마음을 새롭게 갖는 행)을 행하며, 수연행(隨緣行:인연을 중시하며 항상 마음을 곱게 쓰는 행)을 행하며, 무소구행(無所求行:바라는 것 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행)을 행하며, 칭법행(稱法行: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법을 지키려는 행)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한국불교신문
kbulgyo@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