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조원류 법계도에 따르면 달마 29대 석옥청공(石屋淸珙)스님의 법을 계승한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를 한국불교의 초조로 봉대해 나온다. 태고스님으로부터 사자상승제에 의한 불가(선가)의 법맥은 환암혼수스님, 구곡각운스님, 벽계정심스님, 벽송지엄스님, 부용영관스님, 청허휴정스님, 편양언기스님으로 이어져 면몀히 흐른다. 선대선사들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여 불가의 규감으로 삼고자 <인맥을 통해본 한국불교>를 기획하여 초조이신 <태고보우국사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태고보우국사의 생애와 사상(1)
--------민 법현(태고종총무원 사회부장)

[들어가는 글]
맑은 바람이 태고(太古)를 부노라/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을 보니 어지럽기가 배를 탄 것보다 심하고, 몸보다 더 심하게 맘이 뛰는 것은 구불구불 늘어진 구절양장(九折羊腸) 질러가는 말 위에 붙어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 같다고 아우성이다. 이 모든 잘못된 어지럼증은 내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밖에서 느닷없이 들어 온 객진번뇌(客塵煩惱)이니 해결책 또한 밖에서 찾아보고 싶다는 중생심에서 만들어 낸 말이 이른바 양극화(兩極化)이다. 그리고 그런 참 맘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고 제발 좀 알아달라며 쓴 말이 진정성(眞情性)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아는 대로 남에게서 벗겨 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많이 배운 자와 내 것 가져가는 줄도 모르고 입만 헤 벌리고 웃다가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배우지 못한 사람, 어떻게 하면 세금은 적게 내고 챙기기는 많이 해서도 힘들게 형제끼리, 부모 자식끼리 싸워가면서 말년을 허망하게 지내는 부자와 자기도 모르게 더 많은 세금이 제 주머니에서 나가는 줄도 모르고 살면서 저녁 끼니 걱정하는 가난한 이들의 양극화를 해소해 보겠다고 팔 걷어부쳤다는  이들이 어느 쪽에 선 이들인가?
 시장에 포교원을 내다보니 시장에 오고가는 이들도 많이 보고 그들을 끌어들이는 갖가지 냄새들도 맞게 되지만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 주인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일도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들과 많이 닮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저자거리 사람들이 즐겨 보는 드라마에 백제 무왕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서동요(薯童謠)”라는 것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로 무왕은 어린 시절에 돼지감자 비슷한 마(薯)를 팔아 생계를 이으면서도 내일을 경영할 큰 꿈을 꾸었던지 ‘선화공주가 밤마다 맛동방을 안고서 간다’는 노래를 지어 전파력이 빠른 어린이들에게 선물과 함께 가르쳐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룬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얼핏 보다가 참으로 그럴듯한 말을 듣게 되었고 무릎을 크게 치는 일이 있었다. 서동(薯童)인 장이라는 인물이 백제를 일으킬 크게 될 왕이라는 필연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목라수 박사의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동 즉 장이는 높다란 자리에 앉아 불쌍해하는 자비심을 가졌기에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위하여할 대상인 백성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일을 객관적으로 보고 간접적으로 접하면서도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귀족 또는 왕족 출신의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의해 천하디 천한 백성이 되어서 살아내면서 백성에게 다가서는 이가 아닌 자기 자신이 백성이므로 스스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백성을 위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양극화를 해소하는 이의 마음도 또한 그러해야 진심이 통할 것이고 그래야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민중의 마음을 제대로 보는 이라면 없는 말 만들어 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말을 쓰게 될 것이다. 부처님도 그러셨다. “여래(如來)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자기 마을에서 지금 쓰고 있는 그 말로 배우고 익히며 전하도록 해야 한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쓰면서 그것이 제대로 통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음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왕아(法王兒)’라는 기대 어린 칭송을 받고 자란 이가 온생명을 살려내는 부처가 되는 꿈을 꾸고 머리 깎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경전을 읽어 마음을 추슬러서 대승불교의 최고경전이라는 화엄까지 알고 있는 바를 시험하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원각경(圓覺經)』을 보다가 마음에 깨달음이 있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여 스스로 경지(境地)를 체득하였으면서도 객관적인 검증절차를 거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서 선(禪)의 본 고장에 찾아 가서 오도(悟道)를 인정받고 돌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당시 대국에 볼모로 끌려가 있으면서 가진 서러움을 겪었던 공민왕(恭愍王)에게 서러움의 근원인 대국 사람들을 오히려 제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줄기 희망처럼 솟아나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를 제대로 모시면 작디작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것이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다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쉽지 않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을 요즘 말로 나타내면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 어릴 적 시골 사랑방에서 겨울 밤 모여든 처녀총각들이 따뜻한 아랫목에 펴 둔 이불 밑으로 발들을 집어넣고 놀다가 문득 이불을 들췄을 때 어지러이 겹쳐져 있는 다리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용사(龍蛇)가 서로 섞여서 혼잡하게 지내다 보니 뭐가 바른 것인지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중생들에게 맑은 바람으로 다가오는 이가 바로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올곧게 지닌 태고보우선사(太古普愚禪師)다. 우리 민족 누구나가 맛있게 먹는 비빔밥처럼 ‘내 안에 너 있다’는 저자의 어린 아이들이 읊어대는 사랑 이야기처럼 가슴을 울리는 깨달음의 노래를 부른 이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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