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 체(體), 건(健), 영(靈)의 다도관 완성한 한국차의 중흥조1. 머리말2. 출생과 출가3. 다산 정양용과의 만남4.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5. 당대 인사들과의 교류6. 초의 선사의 차세계7. 초의선사의 예술세계8. 맺음말1. 머리말혼란과 격변의 조선후기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風靡)하며 바람처럼 걸림없이 살다 간 초의선사(艸衣禪師)는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서,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킨 대선사로서 한국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이다.우리나라는 가야시대에 외부로부터 차가 전래되었다는 주장과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국토에서 자생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신라 흥덕왕 3년 서기 828년에 김대렴(金大廉)이 당(唐)으로부터 차 종자를 가지고 와 지리산 기슭에 심은 후 쌍계사와 화엄사 등의 스님들을 중심으로 차를 마시는 차 생활이 시작되어 점차 사회 상류층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그 이후 차를 마시는 풍습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부 스님들이나 문인, 사대부들만이 차생활을 하다가 임진왜란 등 국난의 중첩으로 차를 마시는 풍습은 민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져만 갔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차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서 가장 뚜렷한 자취를 남긴 사람이 곧 초의선사라 할 수 있다.이 글에서는 초의선사에 대한 간략한 행장(行狀)과 그가 저술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통한 차의 세계관, 그리고 시, 서, 화 삼절(三絶)을 통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평이하게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2. 출생과 출가살아계실 당시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고 가히 한국차의 중흥조라고 이를 만한 스님의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는 중부(中孚)이며, 법호는 초의(艸衣), 또는 일지암(一枝庵) 등으로 불렸고 세속의 성은 장(張)씨이다.어머니가 꿈에 큰 별 하나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고 하며, 정조 10년 (서기 1786년) 4월 5일 전남 나주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을 맞기도 했었는데, 때 마침 인근 사찰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 스님이 출가 할 것을 권함에 따라 16세 되던 해에 나주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벽봉 민성(碧峰敏性)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 때 받은 법명이 의순(意恂)이다. 의순은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뜻인데 사미계를 준 벽봉 민성스님께서 내린 법명이다.이후 스님은 20세가 되던 해에 대둔사 완호 윤우(玩虎倫佑)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는다. 당시 고승대덕이었던 완호스님 문하에는 ‘의(衣)’라는 돌림자를 가진 제자가 셋이 있었는데 호의, 하의, 초의가 그들이다.완호 스님이 초의(艸衣)라는 법호를 내린 것은 그의 귀기어린 천재성과 번득이는 재주들을 그윽하고 완곡하게 감추어 주려는 뜻에서였다.초의는 19세 때 영암 월출산에 올라갔다가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경험한 이후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불경과 선(禪), 노자, 장자, 범서 등 여러 학문에 정진하여 통달하게 되었다.3. 초의와 정약용과의 만남초의선사가 24세 되던 해 초의와 정약용은 첫 만남을 갖게 되는데 이를 주선한 사람은 강진 백련사 주지 아암 혜장(兒庵惠藏)스님이다.당시 정약용은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帛書)사건-황사영이 신유사옥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조선에서의 천주교 재건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에 압력을 넣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하는 방법, 서양의 군대를 파견하여 조정을 굴복시키는 방법 등의 내용을 비단에 적어 청나라 북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밀서 사건-이 겹쳐지자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한다.그 당시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 향리 범위 내에서는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도록 형이 가벼워지자 강진 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을 짓고 저술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초의와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다산은 초의에게 유학(儒學)과 시학(詩學)을, 초의는 다산에게 茶와 佛法의 가르침을 주고받았다.4. 초의와 추사 김정희의 만남초의 의순과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은 전생의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운명적인 면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동갑내기에다 또한 당대의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천재들이었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진취적인 사상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추사의 심취는 초의스님과의 교분 속에서 더욱 깊어졌는데, 추사의 초년은 예산 화암사에서 지냈고, 중년에 묘향산에 들어갈 때에는 금강경(金剛經)을 호신부로 지니고 다니며 독송할 정도였다. 또 노년에는 백파선사와 선(禪)에 관한 논쟁을 크게 벌이기도 했고, 말년에는 서울 봉은사에서 생활하며 108염주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1815년 서른 살 때 만난 동갑내기 두 분은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으며 뗄 수 없는 벗이 되었다. 「완당선생집」을 보아도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35통)보다 초의에게 보낸 편지(38통)가 더 많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를 주고받고 서(書)를 보낸 횟수도 초의 쪽이 더 많을 정도로 가까웠다.특히 초의는 좋은 차를 추사에게 보내주었고 이를 가슴깊이 감사해 한 추사는 이에 답하는 글씨를 써서 보내주곤 하였다. 「명선(茗禪)」이라는 예서로 쓰여진 작품은 그런 교유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다음 편지에는 초의스님과 차에 대한 간절한 애정이 나타나 있다.편지를 보냈는데 한 번도 답장을 못 받았으니 애가 타오. 아마도 산중에는 바쁜 일이 없을 줄로 생각되는데 혹시나 속세의 나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간절한 나의 처지를 외면하고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건가.… (중략)나는 스님을 보고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빛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거요. <전집 권1 초의에게 34신>이런 우정으로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에는 초의가 제주도로 건너가 6개월이나 벗하며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초의는 추사에게 바친 제문에서 이렇게 그를 깊이 애도하며 회상했다.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도 오랜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별로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그대 얼굴을 대한 듯 했고 그대와 만나 얘기할 때는 정녕 허물이 없었지요. 더구나 제주에서 반 년을 함께 지냈고 용호(蓉湖)에서 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때로 도에 대해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실로 봄바람이나 따사한 햇볕 같았다오….<초의선집>5. 당대 인사들과 교류초의가 속세의 사대부와 학연(學緣), 묵연(墨緣), 시연(詩緣)을 맺은 인연은 추사만이 아니라 추사의 동생 김명희, 다산 정약용과 그의 아들 유산 정학연, 연천 홍석주와 해거 홍현주 형제, 자하 신위 등 당대의 이름높던 유가(儒家)의 선비들이었다.조선조 지식인들의 사귐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유학자들이 문집을 낼 때는 스님들에게서 발문을 얻어 싣고, 스님들이 문집을 낼 때는 유학자들의 발문을 얻어 실은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삼강오륜을 내세운 유학 쪽이 현실적인 틀에 얽매여 부자연스럽다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불교는 해탈의 탈속한 벗어남으로 인해 자유자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연중에 서로 보완관계를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즉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여 조화시키려 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증명받고 싶어했다. 많은 유학의 선비들은 초의스님과 교분을 나누고 시회(詩會)등의 모임을 같이 하며 자기들의 일상의 고루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정신적인 삶(깨끗한 영혼 혹은 걸림없이 사는 자유)을 초의에게서 증명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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