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사와 현대포교 – 대륜화상을 중심으로

   심준보(금강대학교 연구교수)
 

심준보 교수
 

 

Ⅰ. 서론

불이성 법륜사는 원래 유점사의 서울 포교당으로서 대종사 대륜세영(大輪世榮, 1884~1979) 화상(이후 화상으로 통칭하며 경어를 생략함)께서 창건하셨다. 화상은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태고보우국사의 20대 법손(21세 조사)으로 20세기 한국불교에 큰 족적을 남기신 큰스님이시며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시고, 제 1세, 2세 종정을 지내셨다.

조선불교의 전통을 한 몸에 지닌 화상은 젊은 날 당시의 산중불교를 탈피하여 도심불교를 서원하시고 평생을 포교와 수행에 매진하였다. ‘불이성’이란 불교의 진리, 혹은 본사인 유점사와 법륜사가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 법륜사란 불법을 널리 홍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법륜사란 이름만으로도 법륜사가 불교 포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화상의 행화를 통해 그간 주장되어 온 화상의 전기에 대한 내용들을 먼저 검토한다. 다음으로 법륜사가 가진 현대포교의 의의를 살펴본다. 그리고 화상이 포교를 처음 시작하던 시절 많은 도심포교원이 창건되었는데 특히 법륜사가 사격이 크게 발전하고 오늘 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원인을 고찰하였다

Ⅱ. 본론

1) 대륜화상의 행화

화상이 불교계에 남긴 업적은 커서 한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 집대성하여 편찬한 백과사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중요인물로 등재되어 있다.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불교사와 화엄사상사에 전문가인 고 김상현 박사(1947~ 2013)가 집필하였는데 전기가 간략히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번거롭고 부족한 점이 있지만 여기서 인용해 본다.

태고종(太古宗)의 개조이다. 밀양 박씨(密陽 朴氏). 속명과 법명은 대륜, 법호는 법운(法雲)이다. 중보(仲甫)의 아들로,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강원도 고성 출생.
1898년 4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출가하여 낭운(朗雲)의 제자가 되었고, 같은 해 사월초파일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으며, 1900년 10월 유점사에서 안거(安居)에 참여한 이래 47년 동안 수행하였다.
1908년 3월 유점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고, 1909년 3월 서울 수송동 각황사(覺皇寺) 원주(院主)를 자원하여 탑골공원의 원각사(圓覺寺) 복원 또는 사직공원에의 대가람 건립을 위하여 천일기도를 행하였다.
1915년 4월 평양 창전리에 유점사 포교당을 설립하였고, 1917년 3월 일본 불교계를 시찰하였다. 1919년 7월 각황사에서 <금강경>을 지송하던 중 치사리(齒舍利)가 나와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28년 1월 서울 사간동에 법륜사(法輪寺)를 창건하였고, 1929년 7월 <화엄경> 산림법회(山林法會)를 개설하고 자은방생회(慈恩放生會)를 조직하였다. 1940년 4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고, 1945년 4월(62세) 유점사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1950년 10월 불교 이북5도연합 교무원장이 되었다.
1954년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가 발생하자 정법수호를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1956년 2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로 취임하였고, 1956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부장직을 맡았으며, 1960년 6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여 세 번 유임하였다.
1970년 1월 불교분규로 단일종단의 형성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비구승이면서도 대처승 계열인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여 분쟁을 종식하고 균등한 발전을 이루도록 결단을 내렸으며, 태고종의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1975년 7월 한국불교태고종 원로원장에 취임하였고, 7월 1일 법륜사에서 입적하였다. 7월 20일 다비(茶毘)하였는데 사리 5과(顆)가 나왔다. 그는 고려 보우(普愚)의 21세 법손(法孫)으로, 참선 · 간경(看經) · 염불 · 주력(呪力) · 기도 등을 고루 닦았고, 항상 선교겸수(禪敎兼修)할 것을 가르쳤다.
한국불교의 대중화 · 현대화 · 생활화와 청년불교운동의 선봉이 되었던 스님은 ① 질서 있는 대화합(大和合), ② 총지(總智)를 모은 전법교화, ③ 대중을 위한 교법(敎法)의 개발과 계율 준수, ④ 스승에 대한 존경, ⑤ 수행실천과 효경(孝敬)의 겸비, ⑥ 금욕(禁慾), ⑦ 명리를 떠난 보살행(菩薩行)의 실천 등을 지표로 삼았다.

특히 인재양성을 위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약 100명의 직계제자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제자로는 덕암(德庵) · 용봉(龍峰) · 무불(無佛) · 정암(靜巖) · 남허(南虛) · 본공(本空) · 현암(玄庵) · 석천(石泉) · 승종(乘宗) · 범호(梵虎) · 운제 이영무(李英茂) · 이재복(李在福) · 김재수(金在壽) · 김준열(金俊烈)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리탑과 탑비는 법륜사에 있다.

위의 전기를 통해 화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태고의 법손답게 화상은 조선불교의 수행 전통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둘째 불교포교에 진력하였다. 셋째 불교교단 화합에 여생을 바쳤다.
먼저 화상은 조선불교의 전통 승려라면 누구라도 거쳐야 할 과정을 여실히 거치고 그 전통을 한 몸에 익힌 명실공히 조선불교의 마지막 전통 승려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 조선불교는 강원의 승려 교육과정인 이력과정이 거의 완성되고, 수행체계인 삼문수행이 체계화된다. 이력과정은 사집, 사교, 대교로 이루어 져서 사집에는 선요, 서장, 도서와 법집별행록절요사기를, 사교는 원각, 금강, 능엄의 3경과 기신론을 배우고, 대교에서는 화엄, 전등록, 염송을 배운다.

화상은 출가하던 해(1898년) 유점사 반야암의 대월(大月)선사에게 수학하여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치고, 26세 되던 해(1909년)에 설하(雪河)강백 문하에서 사교와 대교를 졸업하여 학인으로서 이력과정을 마쳤다.
삼문체계, 혹은 삼문수행체계란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전통적인 수행 체계로 선, 교, 염불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억불로 인해 종파가 사라지고 불교만 남은 상태에서 조선불교는 면면한 선과 교의 전통을 하나의 교단 안에 아울러야만 했다. 그러므로 휴정 이후 조선불교는 선을 강조하는 선교겸수의 수행 전통을 진작 이루고 있었는데, 특히 백성들의 신앙적 열망에 부응하여 염불왕생의 수행을 포함하여 17세기가 되면 조선불교의 수행체계로 삼문수행이 정립된다.
앞의 인용에서 “참선 · 간경(看經) · 염불 · 주력(呪力) · 기도 등을 고루 닦았고, 항상 선교겸수(禪敎兼修)할 것을 가르쳤다”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화상의 수행은 조선불교의 전통을 오롯이 따른 것이다. 화상은 “17세에 금강산 중내원 선방에서 참선을 시작하였고 18세에 치문, 서장 및 능가경을 수학하여 참선 수행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였다.”
또 앞의 인용에 따르면 “1900년 10월 유점사에서 안거(安居)에 참여한 이래 47년 동안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선수행에 매진하였음에도 불이성 법륜사를 창건하고 처음으로 법회를 시행하면서 화엄산림을 열어 해인사 보담 대강백을 초빙하여 설법하였다.

-조선불교 교종의 핵심이 화엄사상인 점에서 화상은 선을 중시하면서도 교를 겸수하는 선 중심의 선교겸수라는 조선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생동안 염불 수행에 정진하여 손에 항상 염주를 놓지 않았고 염불 중 염불하는 이놈은 누구인가하고 반조하였으니 원융선을 수행한 것 같고”는 글을 통해 염불수행에도 깊이 천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상은 전통적인 조선불교의 삼문수행을 실천한 것 알 수 있다.
또한 화상은 일생을 포교에 진력하였다. 특히 도심포교와 도제양성을 가장 큰 공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상이 도심포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대교과를 수료한 다음 해(1910년)에 서울 각황사(옛 태고사, 지금의 조계사)의 감원(監院)이 되어 6년간 봉사하면서 탑동공원의 원각사지 한수석탑을 예배하며 천일기도를 통해 흥학(興學)포교와 도제양성을 발원한 점과 평양에 유점사 포교당을 창건하고 서울에 불이성 법륜사를 개창한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직계제자만 100인을 넘을 정도로 도제양성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도제양성은 제자를 인간적으로 지극히 아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화상의 보살핌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도제양성으로서도 은법제자 백여 명을 강원으로 불교전문학교로 대학에 이르러 심지어는 중고에 까지 학비 주는 지전을 은행에 가서 새 화폐로 교환해서 직접 납부하셨고 엄동설한이면 공부하는 도제들의 방을 순찰하시며 추울세라 부엌에 팔을 벌려 살피신 후 장작을 손수 집어 주셨으며 음식이나 의류 일체까지도 방심하지 않으신 은사이시다.

대륜노스님의 그 평등한 마음은 모든 중생을 친자식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자하신 마음을 대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도제양성은 이후 교계와 학계에 많은 인재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화상은 또한 인생의 후반부를 교단 화합을 위한 노력에 할애했다. 이것은 결코 일개 교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조선불교의 전통을 어린 시절부터 몸에 숙지해 온 관점에서 한국불교를 관통한 조선불교의 맥맥한 전통이 당시의 비구와 보살승 양측에서 보살승 쪽에 있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색불교의 폐해로 인하여 취처를 한 승려들을 대처승으로 몰아붙여 교계에서 쫓아낼 일이 아니라 교화승으로 인정하여 그들이 지닌 조선불교의 전통을 새로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재창조할 필요가 있음을 화상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처승 교단이란 참으로 망어가 아닐 수 없다. 조선불교가 도성출입이 가능하게 된 이후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취처를 한 승려가 공공연히 인정받게 되었지만 청정비구로서 종신을 한 큰스님들도 적지 않다.
이런 교단을 대처승이란 막말로 모욕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더구나 그런 과정에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유지하여 한국불교의 맥을 잇고 있던 스님들을 쳐내버리는 일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취처를 한 승려는 비록 비구는 아니지만 교화법사의 역할을 통해 사찰을 운영 관리하여 포교에 매진하고, 비구승은 수행승으로 불교의 수행과 계율정신을 지켜나간다면 새로운 한국불교의 미래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고 아울러 같이 한 절집에서 살던 도반들은 내치지 않고 그들의 학덕과 전통을 이용하는 방안으로 화상은 전통적인 교단이 그대로 해방 이후의 교단이 되어 새로운 한국불교의 미래가 되길 바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화상은 1960년 6월 분종 이전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여 세 번 유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단 분열로 인한 대중적 인식의 악화와 불교계의 분열을 막기 위해 1970년 1월 비구승이면서도 보살승 종단인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의 전통을 한 몸에 지니고 도심포교와 도제양성의 불법홍포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교단화합에 여생을 바친 화상의 중심에는 불이성 법륜사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었다. 지금부터 불이성 법륜사를 통해 화상이 행한 도심포교가 현대포교의 측면에서 가진 의의를 고찰해 보자.

2) 법륜사와 현대포교

화상의 도심포교 의지는 학인과정을 마치고 구족계를 품수한 후에 첫 일로 서울에 상경하여 각황사의 원감을 맡고 원각사지에서 천일기도를 올린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무공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회광율사에게서 구족계를 품수한 후에 큰 서원을 세우며 만행을 시작하였다. 곧 서울에 상경하고 그해 서울 수송동 각황사가 병건되자 민중불교의 사명과 도시불교의 중요성을 절감하니 금강산을 나와 각황사 감원에 선임되어 6년간 근무하는 한편 매일 새벽 탑동공원 원각사지 한수석탑을 예배, 고양하면서 흥학포교 도제양성의 큰 뜻을 발원하였다.

화상이 각황사의 감원이 된 것은 1909년 3월이고 평양 유점사 포교원에 포교사로 재직한 것이 1915년이니 이 사이 도심포교의 큰 뜻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에 각황사가 창건된 것은 조선시대 이래 억불정책으로 인해 산중불교로 전락한 조선불교를 새로이 세우려는 도심포교의 일환이었다. 당시 조선불교의 도심포교를 위해 만들어진 도심포교당의 대표가 범어사 포교당인 부산의 동래포교당과 서울 수송동의 각황사였다. 각황사 창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개화기 승려 입성금지 해제 이후 한국불교계의 숙원은 교단의 재건과 도시화, 대중화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불교계는 일본승려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그중에서도 특히 일련종(日蓮宗)과 조동종(曹洞宗) 등의 제 종파에서 포교활동을 맹렬히 펴나감으로써 국내의 불교계는 거의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에 한국불교계는 우리의 불교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하고자 하는 이회광의 원종(圓宗)과 이에 반대하는 한용운, 박한영의 임제종(臨濟宗)이 갈등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10년 원종측이 전국사찰에 의무금을 갹출함으로써 수송동에 각황사를 창건하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 中央會務所)’ 겸 ‘중앙포교소’로 명명하였다. 비록 각황사의 창건주체가 원종측이기는 했으나 분명 각황사는 조선 초의 교단해체와 승려입성 금지로 상징되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산중으로 들어간 불교가 다시금 도심으로 나온 의미 있는 창건이었다.

각황사 등의 창건을 기점으로 1910년대 이후 본사급 사찰을 중심으로 도심에 많은 포교당이 들어서게 되는데, 20년대 까지 세워진 포교당은 용주사 수원포교당(1911), 고운사 안동포교당(1910), 통도사 울산포교당(1911), 동화사 대구포교당(1912), 전등사 개성포교당(1912), 송광사 전주포교당(1912), 귀주사 함흥포교당(1913), 고운사 의성포교당(1913), 표충사 밀양포교당(1913), 석왕사 경사포교당(1914), 유점사 평양포교당(1914), 통도사 무안포교당(1915), 해인사 함양위성포교당(1917), 월정사 강릉포교당(1924), 실상사 임실포교당(1924), 백양본말사 제주포교당(1924), 대흥사 제주포교출장소(1925), 백양사 제주포교소(1925), 통도사 양산포교당(1925), 기림사 울산포교당(1926), 대흥사 강진수인포교당(1926), 해인사 산청포교당(1926), 건봉사 서울포교당(1926), 백양사 태인포교당(1927), 통도사 창원포교당(1927), 기림사 포항포교당(1927), 통도사 의령포교당(1927), 유점사 경성포교당(1928), 화엄사 제주포교당(1928), 봉은사 삼척포교당(1929)등 이었다.
각황사의 당시 도심포교활동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이름 붙인 각황사는 원종이 창종 인가를 받지 못하면서 온전하게 포교당의 기능으로 출발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법회, 강연, 불교행사를 개최하는 등 포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참선회, 열반절 행사, 초파일 행사 등을 열어 불교를 알리기도 했다.
또 일요학교를 개설하고 수계식을 봉행하는가 하면 불교연극 등 문화행사를 선보이며 포교 영역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1912년 4월 부처님오신날에는 초파일 행사를 주야로 성대하게 열어 관객이 천여 명에 달하는 등 포교당 출범 3년 만에 수많은 신도들이 운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각황사 포교당의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서울 인근 승려들이 포교의 공익성을 깨닫고 매주 일요일 각황사를 시찰하는 등 불교계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최초의 도심포교당이라고 할 각황사의 활동을 통하여 도심포교는 이전의 구태의연한 자세를 벗어나 현대적 포교 방식이라고 할 다양한 포교를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대적 포교 방식에는 먼저 정기적 법회를 들 수 있다. 열반절, 초파일의 법회, 일요학교, 참선회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계식과 불교연극 등의 문화 행사를 포함한 다양한 불교행사를 통해 일반인들이 사찰로 찾아오게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포교방식은 각황사 이후에 창건된 도심포교당들의 모델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26년 9월 6일자의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통도사 울산포교당(현재 해남사)의 현대포교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가 운영하는 포교당은 설립(1911) 이후 10여 년간 등상설법(登床說法)의 오래된 방법으로 노단월의 오래된 신도들만 있다가 본산 통도사에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신진포교사 한설악씨를 임명하여 널리 청년신도를 모아 현대적 포교법으로 일요법회, 소년단 등을 조직하고, 고등강습회를 창설하였으며 현재의 포교사인 양대응씨는 여자야학을 만들고 불교청년회를 만들어 발전을 기하는 중이다.

1928년에 개교한 불이성 법륜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내용에 앞서 먼저 유점사본말사지에 기술된 유점사 경성포교소의 사적을 살펴본다.

경성포교소
주소지: 경기도 경성부 사간정 112번지
명칭: 대본산 유점사 경성포교소
면적: 240여평
건물: 기와 지붕 1층 건물(平家建瓦葺) 2동 30여칸
창설: 소화2년(1927) 2월 매입 소화3년(1928) 2월 개교
연혁: 종래 석왕사에서 경영하던 것을 소화2년 2월에 일금 6천원(현 시가 2억 4천에서 3억원에 해당)을 빌려 매입하고 2천원(현 시가 8천에서 1억 2천만원에 해당)으로 수리하여 본산(유점사) 보조비 일금 오백원(현 시가 2천에서 2천5백만원 해당)을 받아 소화 5년(1930) 8월에 빌린 돈의 원리금 도합 9천원을 갚고 소화8년(1933) 8월에 전재산 5만원(현 시가 20-25억 해당)으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대본산금강산유점사경성포교소 독립재산을 만들고 유지하여 오는 바 소화15년(1940) 4월까지 현재 가격 10여만원(현 시가 40억~ 50억 해당)에 도달하였다.

불기 2967년(1940) 경진 4월 말일
설립자 대표 석종세영(釋宗世榮)

법륜사의 포교 활동에 대해서 무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중에 특히 일요법회의 개설은 우리나라 불교의 시초이고 모범이었다. 또한 최초의 신행단체로 불교부인자은방생회를 조직하고 이후 관음회, 반야회, 청년회, 학생회 등 각종 신도회를 조직하여 포교의 활성화를 기했다. 흥학포교와 법전인행 배포에 관심을 가지고 51세에 백유경 2,000부를 인간 배포하였고, 52세에 화엄경보문품 2,000를 배포하였다. 57세에는 설호 강백을 포교사로 모시고 법륜사 강원을 병설, 개강하였다.”

먼저 일요법회의 개설이나 불교부인자은방생회와 같은 부인회의 조직이 국내 최초였다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 앞서 1926년도의 신문 기사에서 보았듯 통도사 울산포교당에서 이미 일요법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용주사 수원포교당(1911년 개원)이 최초일 수 있다.
불교부인자은방생회가 어떤 점에서 최초의 신행 단체로 주장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만약 불교부인회로서 최초라고 한다면 이미 1922년에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도심포교당이라고 할 각황사에서 활동하면서 도심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도심포교의 현장에서 활동한 화상의 이력을 생각할 때 일요법회나 부인회의 최초 조직에 화상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좀 더 증거자료를 확보해야 할 문제이다.
경전의 간행 배포는 이미 조선 시대 이전에도 행해졌기 때문에 꼭 현대적인 포교 방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대륜스님을 중심으로 한 법륜사의 현대포교는 일요법회나 부인회의 최초 조직이라는 점보다도 1970년 대 이후 새롭게 부흥한 한국 도심포교의 특징 중의 하나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리더십의 한 형태인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3) 현대포교에서 대륜화상의 위상

한편으로는 일본불교의 도움을 받아 스님들의 도성출입이 허가됨과 동시에 일본불교의 공세적 포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국불교는 도심포교를 시작하고 1910~ 20년대를 걸쳐서 도심포교당의 창건이 활발했던 것은 앞서 고찰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70년대 까지는 포교당의 신설 빈도가 많이 위축된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면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사회 변화와 이를 틈탄 개신교의 폭발적 증가에 따른 불교계의 위기감을 원인으로 다시금 도심포교당이 세워지게 되는데 특히 이것은 교양불교대학의 활성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시기 도심 포교당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70~80년대의 도심포교당 건립에는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첫째는 도심포교당 설립이 어느 한 도시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의 시 단위 도심지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며, 둘째 포교당 건립운동 출발시점의 현상이었던 교구본사(敎區本寺)의 지원으로 설립되는 포교당보다는 특정승려 개인의 원력과 능력으로 건립되는 대형도심 포교당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본 연구가 불이성 법륜사의 현대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점은 1970년대 이후 대형 도심포교당의 한 특징인 특징 승려 한 개인의 원력과 능력의 가장 최초 모델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이후 대형 도심포교당의 대표격으로는 지광스님의 능인선원, 대행스님의 한마음선원, 우학스님의 영남불교대학을 들 수 있는데 이 스님들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다음과 같다.

대행스님은 근대의 대표적 선승인 한암스님과 탄허스님과의 도반(道伴)으로서 그 법력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이 깊다. 또한 신자들의 구체적인 현실적 문제들을 속시원히 해결해 주는 등 초월적 능력의 신비적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로 작용하고 있다. 지광스님은 서울대 출신의 언론인으로서 해직기자였다는 점에서 행동하는 지성이라는 인상이 신도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또 한 번 기도에 들면 목탁을 든 채로 서서 몇 시간을 꿈쩍도 않고 기도삼매에 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학스님은 매년 두 번의 안거(安居)를 한 번도 빠트리지 않는 수행의 철저함, 수많은 불교대학 강의를 거의 혼자 담당하고 있는 근면함, 10여권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는 지식의 해박함 등으로써 대중들에게 깊은 신뢰와 권위를 사고 있다.

불이성 법륜사는 유점사 경성포교원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발전에 있어서 본사의 지원은 크지 않았다. 앞서 포교원을 창건할 때 6천원(현 시가 2억 4천에서 3억 원에 해당)을 빌려 매입하고 2천원(현 시가 8천에서 1억 2천만원에 해당)으로 수리하였는데 후에 본산(유점사) 보조비 일금 오백원(현 시가 2천에서 2천5백만원 해당)을 받아 소화 5년(1930) 8월에 빌린 돈의 원리금 도합 9천원을 갚았음을 보았다. 유점사의 보조는 전체 창건 비용의 20분의 1에 그친다. 뿐만 아니라 창건 13년 후인 1940년에는 창건 비용의 11배인 10만원으로 절의 자산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비구계를 받고 서울에 온 이후 도심포교를 서원하고 천일기도를 올린 화상의 서원과 정진력을 먼저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상은 지계와 고행에 철저한 수행자였다. 화상은 원효의 발심수행장에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에 감동되어 평생 방석과 요를 깔지 않고 생활하였다. 또한 자비심이 매우 커서 공부하는 학인 제자들의 방석에 직접 땔감을 넣으시고, 학비를 새 지폐로 손수 마련해 줄 정도였음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가 있다. 이와 같은 서원, 정진력, 지계, 자비심이 오늘 날의 불이성 법륜사를 한국 불교에 우뚝 서게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상이 포교의 일선에 서원을 세우고 뛰어든 1910년대와 20년대는 많은 본사 사찰들이 우후죽순으로 도심포교당을 창건하였음을 앞서 보았다. 또한 포교 방식도 근대적인 방법을 택하여 서로 유사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오늘 날 불이성 법륜사 이상으로 사격을 키운 포교원은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 날 불이성 법륜사의 사격은 화상의 원력과 정진, 지계와 자비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늘 날 현대포교에 성공하여 대형 사찰을 이룬 소수의 사찰들은 다양한 포교 방식을 이용해 불자들을 모아서 교육시킴으로서 불법의 혜명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그러나 그 가장 근원에는 화상의 시절과 마찬가지로 종교지도자의 개인적 서원과 정진이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현대포교의 관점에서 화상의 위상은 어떤 구체적 현대 포교 방식보다도 오히려 전통적인 원력과 정진, 지계와 자비심에 철저했던 수행자의 꼿꼿함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Ⅲ. 결론
본 연구는 대종사 대륜세영화상이 창건한 불이성 법륜사의 현대포교적 의의를 고찰하였다. 먼저 이를 위해 화상의 행화를 검토한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도출되었다. 먼저 화상의 정확한 생년, 그리고 법호와 법명의 문제, 각황사 감원이 된 시기와 과연 당시의 소임이 감원이었는가 하는 문제, 유점사 평양포교원의 설립에서 화상이 담당한 역할 등을 제시할 수 있다. 화상은 근현대 한국불교계의 고승이며 아울러 한 종단을 창종한 종조이다. 의외로 화상의 기본적인 전기에도 불명료한 점이 많음을 느끼면서 시급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불이성 법륜사와 현대적 포교 방법에 대해서 고찰한바 기존에 알려진 일요법회나 부인회 단체를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초로 시행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함을 알게 되었다. 화상과 법륜사가 가진 현대불교의 위상은 어떤 방편을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보다도 1970년대 이후 도심 대형포교당의 중요 특징 중의 하나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위상이라는 점에 있음을 본 연구는 강조했다. 특히 화상은 평생을 포교의 서원과 그를 이루려는 정진, 그리고 지계와 고행의 엄격한 삶을 사시면서도 제자와 신도들에게 한없는 자비심을 베푼 점에서 매우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종교지도자이다.
물론 현대적 포교 방편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불자를 지도하는 지도법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이 선결되어야 함을 본 연구는 주장했고, 그런 점에서 화상과 법륜사는 현대포교가 배워야 할 종교지도자의 리더쉽을 통해 발전한 도량으로서 현대 포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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