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07-19 10:25 (목)
   |   
불기 2562(2018)년 07월 19일 목요일
현대사회의 갈등에 대한 불교적 접근 - 의덕스님 발표
현대사회의 갈등에 대한 불교적 접근 - 의덕스님 발표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7.02.01 0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 위한 실천과제는 ‘소욕지족 • 자리이타 • 중도 • 공정성과 평등성 중시 • 탈(脫)발전 시대로의 전환’

(사)한국종교협의회(회장 유경석)는 지난 12월 19일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1층 대회의실에서 제 4차 종교평화헌장 세미나를 개최했다. ‘한국사회 갈등(양극화 문제) 해소를 위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큰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 주제발표에 앞서 총무원장 도산스님이 인사말씀을 했고, 종교평화헌장 낭독에 이어 김항제 한국종교협의회 종교평화회의 의장이 기조연설을 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김도균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홍보위원장이 ‘한국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유병무 대순진리회 교무부 연구위원이 ‘양극화 시대, 대순사상을 통한 방향성 모색’을, 의덕스님(삼일선원 주지)이 ‘현대사회의 갈등에 대한 불교적 접근’에 대해 발표해 각 종교적 시각에서 한국사회 갈등과 양극화 문제 해소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이중 의덕스님의 주제발표를 요약소개한다.   <편집자 주>

▲ (사)한국종교협의회 주최 세미나에서 ‘현대사회의 갈등에 대한 불교적 접근’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의덕스님(사진 맨 오른쪽).

 갈등해소를 위한 상생과 행복

 불교는 170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활문화의 원천이며, 그 시대의 사회를 이끌어온 정신적 기반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불교를 통해 우주와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해 왔고, 삶의 올바른 가치와 사회의 당면한 지표들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교의 역할은 복잡한 현 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작금의 경제상황을 보면 물질적 성장만 추구하다 보니 전통적 인의는 사라지고 이기심, 불신, 불만 등이 가득 찬 사회가 되었다.
지난 1980년대 이후 현대경영과 신자유주의는 세계의 경제 • 경영을 국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경쟁을 통한 성장원리를 관철시킨 결과,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갈등과 양극화를 확대시키고 있는데.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가계부채는 1300조 원에 육박하며,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급여 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1,000만 명에 달한다. 720만 명의 자영업자 가운데 절반이 100만 원도 벌지 못한 체 빚만 키우고 있고, 매년 80만 명, 5년 안에 70%가 폐업하고 있으며, 다단계에 종사하는 572만 명 가운데 78%가 단 돈 1원도 벌지 못했다.

상위 10%가 전체 종합소득의 55.5%를 가져갔으며, 실업자는 300만 명에 육박하고 청년의 절반은 백수다. 기업은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이에 항의하면 공권력이 동원된다. 이런 현실에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비정상적인 국정농단으로 그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은 분노의 촛불을 들고 거리를 나서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불교를 통하여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웃에 대해 자비심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나아가 불교는 새로운 미래사회의 정신문명을 제시하고 대립과 갈등에서 조화와 협력으로 포용해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담지하고 있다.

불교는 단순히 지식이나 이론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학문체계가 아니라 수행과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교가 인간고를 해결하고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오늘의 현대사회가 처해 있는 위기와 이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경영원리는 단순히 영리추구만이 아니라 국가경영이나 개인생활방식까지도 고려한 폭 넓은 의미에서 상생 • 행복을 위한 경영윤리의 확립이 요구된다. 지구환경의 보존, 소득과 부의 격차축소, 소욕지족 등을 통하여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경제행위의 세속적인 활동과 거래에 대한 불교인의 자세는 정신적 부와 물질적 부가 합일될 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행복이란 정신적 차원과 물질적 안락함이 합일되어 삶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할 때만이 가능한 것으로 물질적 부만큼이나 정신적인 행복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붓다는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사성제(苦, 集, 滅, 道)와 팔정도를 통하여 항구적인 행복의 길을 제시하였다.
먼저 행복의 개념을 서양과 동양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의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라고 전제를 하고, 그 무한한 욕망을 어떻게 하면 많이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동시에 탐욕과 집착으로 부를 증가시켜서 무엇이든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동양사상인 불교에서는 물질보다 정신적인 면에 초점을 두어 소욕지족, 즉 탐욕과 집착 등 욕망을 최소화하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본다. 욕망이 줄어들수록 상대적으로 행복은 늘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 거래, 소비 등의 경제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생활(正命)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교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욕망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나아가서 생태계 전체의 진정한 행복에 있다.

한편 붓다다사는 세 가지 형태의 욕망을 극복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스러워지려면 선행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선행을 뛰어넘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무상 • 고 • 무아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상태로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것을 가지거나 어떤 상태로 되었을 때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계속 던져 보고 심사숙고 하여야 한다.

현대 기업경영에서 고객만족을 ‘자리이타’라는 말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불교의 ‘자리이타’ 정신은 결국 철저한 고객지향정신이다. 고객을 진정으로 섬긴다는 마음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이로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경영하면 그 공덕으로 그 회사는 무한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의 300여 년 지속 성장 비결도 이른 바 상생이라 할 수 있다. 흉년에 남의 땅을 싸게 사지 않는다는 윤리의식과 100리 이내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는 부자로서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만석 이상 생산을 늘리지 않아 소규모 생산자들과 공생을 추구하겠다는 상생철학이 가져온 결과이다.

이와같이 협력업체, 중소기업, 고객, 사회, 직원, 주주는 각 경영의 주체로서 상생 • 행복을 추구해야 공존할 수가 있다. 누구 한 주체만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그 생태계는 자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노 • 사 관계에 있어서는 기업의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근로자를 친족처럼 사랑하고 아끼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사전에 챙긴다면 근로자들도 회사의 경영자와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런 회사의 운영으로 사용자와 근로자간의 신뢰가 형성된다면 회사의 발전이 바로 근로자 자신의 발전으로 생각하는 윈- 윈(Win-Win)전략으로 상생 • 행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부(富)의 집중정도가 심하여 계층 간의 위화감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것을 개선하려면 가진 자의 아량이 필요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에 동참하고 있지만 가진 자 중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으로 알고 헌신할 때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富의 편중으로 계층간 위화감 심각

시장기능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는 적절한 정부개입마저 봉쇄했으며 총체적인 정책실패와 탐욕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스위스 다보스포럼 참석자들이 제시하는 처방전에는 세 개의 공통분모가 있다. 우선,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키웠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것. 둘째, 정책당국자와 금융종사자, 자본가들의 참회와 솔직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 다보스포럼 창설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나는 자유시장 경제체제 신봉자이지만,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셋째, 이제부터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수선과 보완에 나서야 한다. 수술의 방향은 성장과 분배의 두 기둥 가운데 분배기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미국의 금융시장 파탄으로 인한 세계적 불황이 모두가 돈으로 귀결되면서 국경을 넘어선 시장의 확대와 탐욕 속에서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물질=행복 인양 오직 물질(돈)의 축적을 추구하며 달려온 결과가 부의 지나친 양극화로 세계적인 문제로 떠올랐음을 월가의 소요를 통해 본다. 서로가 더 많은 물질을 가지려는 경쟁의 세상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해결방법을 찾기 어렵고 불교적 사유만이 해결책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재화의 획득과 증식 그리고 이윤의 추구를 인정하나 경제활동의 원칙으로 자리이타, 나눔과 회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삶의 목적은 상생을 통한 행복 즉 열반이다. 열반은 병들거나 늙거나 근심 • 걱정하는 일이 없고, 더러움도 없고 죽음도 없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것을 말한다. 번뇌의 원인인 탐욕심을 완전히 버려서 얻을 수 있는 경지인 무욕(無慾)의 경지가 깨달음의 경지이며 지혜의 보고(寶庫)이고 열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적 관점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여 얻게 되는 것도 열반을 추구하는 수단이며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붓다의 탁발은 불법의 진리구현 그 자체이며, 깨달음의 실천적 생활양식이 승가의 보편적 생활양식이 되며, 승가가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는 주요 통로이자 중생제도의 일차관문이다.
탁발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말한다. ① 아집과 아만심을 버리는 수행의 한 방편, ②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지향하는 수행자의 소욕지족의 정신, ③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되게끔 하고, ④ 몸에 괴로움이 있음을 알게 함이다.

탁발은 붓다와 중생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나타내며, 이는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의 실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붓다가 성도(成道)한 후에 그대로 열반에 들려 하였으나, 범천왕이 중생제도를 위한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붓다의 삶을 이곳 사바세계에 붙들어 두었다면, 붓다는 중생들이 주는 것으로만 영위하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는 상생의 관계이다.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

붓다의 삶은 오직 진리에 따르는 삶 그 자체이며, 그 진리를 통하여 생사윤회의 고(苦)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중생들은 붓다의 생명을 온전히 살려나가야 할 의무를 가진다.
즉 붓다가 생사를 초월한 생활방식을 통해 중생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전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을 볼 때, 붓다의 존재 이유는 중생제도에 있으며, 그 실현은 결코 안주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소 낮추어 실천하는데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이며, 그 정신은 자신의 목숨을 중생들에게 철저히 내맡기면서, 중생제도의 원력을 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상생이란 보살사상의 자리이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보살행의 정수는 이타행을 통한 성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분리될 수 없는 불이(不二)이며 연기하는 개념이다. 자와 타의 연기성으로 말미암아 자리와 이타는 상호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연기적 세계관은, 세계 내의 각 대상들은 단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대상들을 서로 포함하며, 사실상 각각의 대상은 서로 다른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니, 한 티끌의 먼지 입자에도 무수히 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화엄경>의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사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연기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상생하여야 하는 운명이다. 붓다가 깨달음의 대사(大事)를 달성한 후 법륜을 굴리며 중생제도라는 이타의 활동을 한 것은 상생의 전형으로 ‘남을 구제함으로써 자신이 구제된다’ 는 이타자리원만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타자리의 정신에 투철하여 자기가 쌓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며, 일체 중생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대승불교에서 꽃핀 하나의 실천 원리이자 삶이다.

보살의 이타서원의 삶은 자타평등 혹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이상을 현실 속에 구현하고자 하는 동체대비이며, 보살의 실천적 수행으로 열거되는 십바라밀과 사섭법•사무량심의 덕목이 자타불이의 현양이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의 출가의 직접적 동기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涅槃)을 얻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잡아함경> 권14, 346).”

구도의 목적이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삶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을 위한 실천과제

행복은 사람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데, 이것을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살펴보자.
첫째, 소욕지족(少欲知足)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선진국들의 평균소득은 가파르게 치솟은 반면에 행복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임상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불행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과 물질에 집착하여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그곳에 쏟아 붓느라 우정을 키우며 타인을 돕는 등 정신적으로 성숙시키는 활동이나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 불교에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서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타자를 이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이롭게 하며, 타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이타가 자리인 것이다. 사진은 어려운 이웃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연탄을 보시, 직접 배달하고 있는 불자들. <한국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소득 집단에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중산층의 경우보다도 더 많다는 사실이 발견되는데,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서 우리의 주관적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풍요에 금방 적응되어 그 혜택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득이 주관적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한계 효용의 법칙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탐욕과 집착에서 소욕지족을 지향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내면의 수행이 따르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편안한 환경 속에서 지내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바라는 기쁨과 행복을 절대로 느낄 수가 없다고 했다.

반면에 당신의 내면이 고요하고 평화롭다면 행복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갖가지 편리함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변함없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불교적 수행과 체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소비생활은 재화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불교의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인간이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평온과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한 완전한 무욕의 상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붓다는 욕망을 좇기 보다는 욕심을 줄이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줄 알라(少欲知足)고 가르친다. 이 소욕지족의 가르침을 소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최소한의 소비로서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둘째,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불교에서 자리와 이타는 서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타자를 이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이롭게 하며, 타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이타가 자리인 것이다. 자리이타는 기업이 자기 자신만의 이익추구 활동에 제동을 걸며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공존 • 공영의 활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자리이타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의 연기성과 과업환경과의 불이(不二)적 관계성 등으로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아담 스미스가 ‘개인의 이윤 추구’라는 문구를 만들어 내고 개인의 이윤 추구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 믿는 것에 반하여 일에 대한 불교적 동기는 자신과 타인, 둘 다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타인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개념에서는 자리와 이타는 양립할 수 없는 양 극단의 개념이지만, 불교사상에 있어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분리할 수 없는 불이(不二)의 개념이다. <금강경>에서 볼 수 있는 보살행으로써의 무주상보시는 사전적으로 자리니 이타니 하는 개념의 성립 이전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자리가 가능할 때 지속적인 회향과 이타행이 가능해진다.

동시에 <숫타니파타>는 “엄청난 부와 황금이 있고 먹을 것이 많은 사람이 다만 혼자서 누리고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번 돈은 우리들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을 위해서 바르게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기적 욕망과 탐욕을 대승적 이타의 원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으로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물질적 가치의 추구를 뛰어넘는 해탈과 열반에 있기 때문에 자비와 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도리에 맞는 올바른 길이 중도

셋째, 중도(中道)이다. 불교는 종종 ‘중도’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붓다가 금욕주의와 욕망에 의한 탐닉, 두 극단을 모두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족으로서 물질적으로 안락한 삶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고행(苦行)에 대하여 쓸모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피하고 필요한 시기에 남을 도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재물을 쓰는 데 있어서 사치스러워서는 안 되며, 분수에 맞도록 올바른 대상을 선택해서 주어야 한다. 속이거나 강요하는 자에게는 차라리 걸식하게 할지언정 재물을 주지 말라”고 설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절제된 관점으로, 불교는 족함을 아는 것과 함께 중도와 상생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족함을 앎으로써 중도가 가능하고 상생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족함을 아는 마음으로 이어져 간다. 중도는 도리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다.

일상생활로 말하자면 절도(節度)있는 생활방식, 즉, 자기 분수를 알아 총수입의 사분법에 의한 절제된 생활 속에서 과잉과 결핍의 양극단 상황을 배제하여 탐욕 • 방일(放逸) • 향락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중아함경 제135경‘선생경’).

중도는 개인의 생활자세의 개선에 그치지 않고 사회전체로서 어떻게 중도를 확보할 것인지는 케인즈의 경제이론의 적용처럼 개인과 기업은 물론 정치 • 사회적으로도 고민해야 할 문제라 본다.

넷째, 공정성과 평등성을 중시한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은 공평하지 않는 것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우수한 학교를 다닌 사람은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혜택을 누릴 수 있고, 재능과 소질, 부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우월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힘은 경쟁이고, 경쟁은 공정성이 전제됐을 때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에 대해서 정부가 여론 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다. 국민들의 73%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하여 국민들 대다수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을 보면 경쟁은 마라톤에서처럼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공정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는 경쟁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역설(逆說)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 시장이 냉혹한 경쟁을 작동원리로 삼는 이유는 순위가 뒤바뀌는 역동성과 효율성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의 현실은 재벌은 영원한 승자로 끝없는 기득권을 누리고, 하청업체로 전락한 중소기업은 영원한 ‘을(乙)’로 남게 돼 있는 실정이다. 재벌 대기업은 재벌 2 • 3 • 4세에게 일감 몰아주기로 대주주와 계열사를 부당지원하는 반칙이 난무하는 기업의 현실, 대기업은 하청업체의 회계장부를 감사해서 가격까지 정하고 비용을 전가하여, 재벌 대기업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며 직원도 높은 연봉을 받고 있으나, 하청 중소기업은 간신히 생존하고 직원들은 저임금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자이자 컨설턴트이기도 한 피터 코닝은 그의 저서 <공정사회란 무엇인가(The fair society)>에서 “탐욕이 좋은 것이라는 말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 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깨어 있다고 할 수 있다”면서도“탐욕에는 다른 사람의 욕구와 공로를 염두에 두지 않는 무제한적 자기중심주의가 포함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제한적인 탐욕의 세태로 재벌 대기업과 1% 부자의 탐욕이 자주 거론되고 있으나, 사실은 계층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 탐욕에 절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불공정 경쟁과 승자독식 구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미국 버클리대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그의 저서 <슈퍼자본주의>에서 “대기업이 제공하는 편익에서 시민들은 소비자 투자자로서 능력이 향상됐지만 반대로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능력이 퇴보됐다”고 말한다.
영국 노팅엄대학의 리처드 윌킨슨 교수는 스피릿 레벨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데, 그의 연구는 다음의 가설을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범죄 • 정신병과 같은 사회병리 현상은 절대빈곤보다도 상대적 경제 불평등과 더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연구 결과는 실제의 사회병리현상은 한 국가의 전체적인 부의 크기나 1인당 평균 소득과는 상관이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기대수명이 선진국 중 가장 낮았고 범죄의 위험도 매우 높은데, 이는 경제 불평등이 심화된 결과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덜한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병리지수는 낮으며, 불평등이 심각한 미국 • 영국 등은 그 지수가 높다.

한국의 불평등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제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이며, 사회적 계층이동의 통로까지 막히고 있어 경제의 불평등을 줄이지 않으면 건전한 사회로 발전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불평등을 줄이는 첫걸음은 조세정책일 수밖에 없다. 세금을 통한 소득이전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국가는 건강하다. 조세부담율과 경제 불평등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조세부담율이 높은 북유럽 국가는 경제 불평등이 낮고, 반면에 조세부담율이 낮은 미국 • 그리스 • 터키 등은 모두 경제의 불평등이 높다. 한국의 조세부담율은 OECD 국가 중에서도 하위권으로 한국의 경제 불평등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선 부유층의 조세부담율을 높여 극빈자의 후생을 올려줄 수 있는 소득분배정책을 고려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한편 불교에서 평등이란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사회에 구현된다. 자비의 실천은 시여 또는 보시라는 실천 덕목으로 더욱 구체화되며 복전사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붓다는 “병자를 돌보아 주는 것은 곧 나(붓다)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고 한 <증일아함경>의 가르침이나 "어떤 괴로움이 가장 중한가, 이른바 빈궁의 괴로움이다.”라고 <금색왕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절한 재분배정책을 통해 사회적 공정을 실현하는 등 국가의 분배정책의 중요성과 올바른 경제운영의 방향을 제시한다.

다섯째, 탈(脫)발전 시대로의 전환이다.
자본주의적 원리로 끝없이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해야할 뿐만 아니라 생산 경쟁으로 인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인류의 근간을 위협하는 본질적인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러미스(C. Douglas Lummis)는 환경의 위기 때문에 “제로성장을 환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은 상호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발전’ 하면 곧바로 ‘경제 발전’이 떠오를 정도로 발전, 빈곤, 진보 등의 문제를 모두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것이 다양한 문화를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인간 자신마저 소외시키는 등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궁극적으로는 자본가나 부자와 같은 지배계층을 위한 발전으로 귀착됨으로써 국내적 불평등은 물론 지구적 불평등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으로 탈(脫)발전의 시대에 주목한다. 탈(脫)발전의 시대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여 불평등이 없는 공동체와 같은 가치가 부상할 가능성이 높으며, 불교의 실천적 요구도 증가할 것이다.

탈(脫)발전의 시대에 인류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로서, 즉 자연환경을 살리는 생태적 생존의 가치, 공동체적 가치인 공존의 가치, 그리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자존의 가치를 제공해 준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할 가치와 목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 GDP가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 진보를 가름하는 잣대로서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다. 일례로 일본 동북부에서 지진과 쓰나미로 2만 명 가까운 사람의 목숨을 잃었지만, GDP 통계는 그 비극을 반영하지 않고, 피해 복구에 들어갈 300~400조 원 만큼 ‘성장’으로 잡을 뿐이기 때문에, 참으로 삶의 질과 체감 행복을 잘 보여줄 정책이 요구된다.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 내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을 찾아주는 데 힘써야 한다. 오로지 부자가 되려는 열망과 경쟁만 있는 사회는 행복할 수 없다.

하나의 촛불로 1000개의 초에 불을 붙일 수 있다. 그렇다고 처음 촛불의 생명이 짧아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행복도 그렇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제로(zero)성장에도 만족해야

소욕으로 만족을 느끼면서 생활할 때 인간관계에서 긴장과 갈등이 제거되고 우호적인 삶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족함을 안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기업을 포함하여 사회적 • 경제적으로 족함을 아는 의식의 확산이 불가결하다.

경제성장률로 말하자면, 매년 지속적인 플러스의 고도성장 목표에만 집착하는 것이 탐욕이라면, 때로는 제로(Zero)성장도 만족해야 한다. 제로성장 혹은 저(低)성장일지라도 물질적인 양(量)의 확대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불교적 회향은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 • 격려 • 나눔 • 배려를 하는데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장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비인간적인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진정에서 우러나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격려를 갈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현시대에 젊은이들만 위로와 공감, 그리고 격려가 필요한가? 아니다. 모든 세대의 남녀, 모든 지위와 직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위로와 공감, 그리고 격려를 갈구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지도자들의 역할은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진실한 위로와 공감, 그리고 격려의 자리를 만들 책무가 있다. 다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동시에 그들이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현대 사회인들의 갈등요인을 해소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구적인 행복인 열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만 한다.

   
 
 
의덕스님은?

• 2007년 보경스님을 은사로 법륜사에서 출가득도. 2011년 구족계 수계.
• 197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1980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마케팅 전공).
• 2009년 동방불교대학 졸업.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과정 수학(선학과).
• 2012년 <태고보우의 불교경영관 연구>로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불교경영학 박사학위 취득.
• 현재 경기동부교구종무원 사회복지국장, 불이성 법륜사 사회국장, 경기도 광주시 삼일선원 주지. ‘불교경영연구원’ 사찰경영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