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나의 보살님, 구족 우바이

선재 동자는 바다에 머무르는 남쪽 해주성을 찾아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 내가 만난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보면 마치 봄 날씨 같아서 모든 착한 법의 씨앗을 자라게 하니 나의 스승이 되고, 연못에 비치는 해가 연꽃을 피우게 하고 푸근한 보름달과 같으니 모든 세상을 다 품어주는 나의 사랑이 되고, 온갖 지혜의 꽃과 열매가 되니 나의 희망과 마침내 보살도를 깨닫는 목적지가 될 수 있겠구나!’ 싶으니 그 고마움에 가슴이 벅차오르며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보리도 데리고 잘 공부시켜서 보살도를 이루어줘야 하는 사명감이 생기자 보리의 손을 꼭 잡으며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오빠, 왜 그래? 손에 쥐났어?”
“응? 아니. 너를 잘 데리고 다녀야지 싶어서….”
“근데, 잘 데리고 다니려면 손바닥을 간질거려야 해?”
“흐흐흐, 꼭 그렇다기보다….”
무안해진 선재 동자가 보리의 손을 놓고 갑자기 뛰어간다.
“오빠아, 잘 데리고 다닌다면서 왜 혼자 뛰어 가!”
보리도 선재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해주성에 다다르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성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남자 모습이었다. 그림 아래에는 ‘비드야 나빠’라고 써 있었다.
보리가 함께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안녕, 난 보리라고 해. 넌 이름이 비드야야?”
보리를 향해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 나는 짜라마노야. 비드야는 우리 아빠 이름이야.”
선재도 울면서 말하는 아이가 불쌍했는지 같이 쭈그려 앉았다.
“근데 아빠가 왜 나빠?”
“몰라, 근데 집에 안 오니까 나빠. 엄마가 밤마다 기도하면서 울어.”
“그럼, 엄마는 어디 계셔?”
보리가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그러자 더 큰소리로 울며 말했다.
“으아앙…. 엄마는, 흑흑… 엄마는 아빠가 돈을 안 준다고 해서 돈 벌러 갔어. 엉엉.”
저녁 때가 다 되도록 짜라마노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성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구족 우바이님 만나러 가보자. 밥을 주실 거야!”
“아니야, 기다렸다가 엄마랑 같이 먹어야 해. 근데, 구족 우바이? 우바이가 뭐야?”
“으응, 불교를 믿는 여자들을 통틀어 하는 말인데 보통은 보살님이라고 해”
더 기다리겠다는 짜라마노를 달래서 보리는 손을 잡고 해주성 안으로 선재와 함께 들어갔다. 구족 보살님의 아주 넓은 성은 여러 가지 보배로 장엄하였고 사방에 있는 문들도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하나도 없고 작은 그릇만 그녀 앞에 달랑 놓여 있었다. 보배자리에 앉은 구족 보살님의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에서 아주 묘하고 은은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선재가 보리와 함께 그녀의 발밑에 세 번 절하고 말하였다.
“거룩하신 이여, 저에게 보살도를 가르쳐주소서.”
구족 보살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보살의 다함이 없는 복덕장 해탈문을 얻었으므로 이렇게 작은 그릇에서도 중생들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단다. 예를 들면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그릇으로 맛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어도 그릇의 음식은 끝나지도 줄지도 않는단다. 또한 이 그릇을 가지고 천상으로 가면 하늘들을 만족하게 하고 여기 인간계로 내려오면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냐?”

삽화=서연진 화백
삽화=서연진 화백

 

짜라마노는 자기를 가리키는 걸 알고 얼른 보리 뒤로 몸을 숨겼다. 보리가 합장하고 반 배를 올린 뒤 말했다.
“예, 짜라마노라고 하는데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근데 배는 고픈가 봐요.”
구족 보살님이 갑자기 하하하 웃으시며 말했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배가 고픈 게로구나. 얼른 이리 와서 밥 먹어.”
아이들이 작은 그릇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자 그릇 속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선재와 보리가 허겁지겁 먹는 사이에 짜라마노는 먹는 척하면서 뒤로 음식들을 숨겼다. 이를 본 구족 보살님이 바구니를 가져와 숨긴 음식보다 두 배로 챙겨 짜라마노에게 주었다.
“참, 기특한 아들이구나. 집에 가면 엄마가 와 계실 테니 함께 나눠 먹으렴. 그리고 배고프면 언제든지 오려무나, 엄마도 함께 와.”
해가 저물어서 보리와 선재는 짜라마노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하였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깨끗이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 보기에는 따뜻하고 좋은 집 같았다.
선재가 그간의 일들을 말씀드리고 나오려 하자 짜라마노의 엄마 빠라미타가 보리의 손을 잡았다.
“아이를 보살펴줬으니 자고 가면 어때? 어차피 짜라마노랑 둘만 잘 거라서...”
보리와 선재는 그녀의 따뜻한 미소에 자고 가기로 하였다.
“엄마, 오늘도 아빠 안 온대? ”
“응.”
“왜?”
“아빠는 엄마와 말하기 싫대.”
“그러니까 왜 싫냐구...”
“...”
빠라미타는 아들을 향해 쳐다보는 눈이 웃고 있는데 슬퍼 보였다.
“그럼, 우리도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보자. 가족들이 서로 좋아할 수 있게.”
“아빤 비염이 있어서 강아지 털 싫어해.”
“그럼... 털없는 강아지로 키우면 되지.”
“엄마, 근데... 혹시 아빠 여자친구 생겼어?”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런 거 같아.”
“아하, 그래서 그 여자친구랑 이야기를 많이 해서 엄마랑 할 말이 없나 봐.”
“...”
“으음! 그러면 엄마도 남자친구 만들어. 내 친구 중에 부자 아빠 있는데 거기도 엄마가 없대.”
“짜라마노. 엄마는 그런 거 싫어해! 너는 그냥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학교 공부나 해.”
“엄마가 밤마다 자꾸 우니까 그렇지.”
보리는 예쁘고 단정한 빠라미타가 불쌍해서 다음날 구족 보살님께 데려갔다. 이미 구족 보살님은 다 알고 계신 듯 빠라미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비드야는 지금은 자신이 잘못한 줄 모르고 날뛰지만, 얼마 못 가서 자기 행동을 뉘우치게 될 거야.”
빠라미타가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서러움이 복받치는 지 구족 보살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며 울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겠는데 아이가 너무 불쌍해요. 짜라마노 학비며 생활비도 안 준다고 하고 이제 집을 나가서 안들어오고... 흑흑, 일자리도 아이가 어리니까 잘 안 써줘요. 흑흑...”
구족 보살님이 그녀의 등을 가만가만히 쓸어주며 토닥거렸다.
“슬프겠지만 참고 열심히 기도하세요. 부처님께서 어려운 사람들 밥은 굶기지 않으려고 저를 보내주셨잖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재난은 소멸시키고 길하고 좋은 일 일이 생기는 ‘불설 소재 길상 다라니’와 ‘항마진언’, ‘원성취 진언’을 매일 일곱 번씩 해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보살님, 제게도 좋은 날이 올까요? 저는 세 식구 소박하게 오순도순 사는 게 꿈이에요. 밥도 같이 먹고, 놀러도 같이 가고, 웃으며 사는 게 머가 그리 어려울까요? 그게 큰 욕심인가요?”
선재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보리의 손을 잡았다. 보리는 코를 훌쩍이며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러게요, 남들은 가족들과 같이 밥 먹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소중한 꿈이 되는 집도 있으니까요. 보잘 것 없는 것들도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될 수 있어요.”
그러자 선재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맞아, 속담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어.”
“오빠앗!”
구족 보살님이 미소를 지으며 빠라미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맞아요, 발에 차이는 개똥도 약으로 쓰려고 하면 안 보이는 법이죠. 무엇이든 인연이 닿아야 만나는 겁니다. 비드야하고도 잠시 인연이 끊어질 뿐이지, 부부의 인연은 하늘에서 맺어 준다고 하잖아요.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서 돌아와 참회하게 만드세요. 그것이 참된 우바이의 모습이랍니다.”
“저도 우바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밤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니까 부처님 앞에서는 다 우바이랍니다.”
빠라미타가 허리를 숙여 삼배하고 물러난 뒤 구족 보살이 선재에게 말했다.
“착하고 착한 선재야, 너는 이미 무상 보리심을 내었으니, 비드야가 나중에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서 짜라마노와 그의 엄마에게 용서를 비는 것을 미리 보았겠지? 또한 나는 복덕장 해탈문을 알고 있지만 저 보살들의 바다처럼 넓고 깊은 공덕과 허공처럼 광대하며 여의주처럼 둥글고 원만하게 중생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남쪽 대흥성에 가서 명지거사에게 보살행을 물어보도록 하여라.”
선재는 고개를 숙여 크나큰 존경심으로 복덕의 길을 닦으며 복덕장 해탈의 광명을 실천하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구족 보살님을 나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한다.

-2022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 부문 입상자

【각주】

비드야 : 산스크리트어로, 번뇌.
짜라마노 : 산스크리트어로, 할 수 있는 것을 원하다.
우바이 ; 불교를 믿는 여자, 청신녀라고도 함.
복덕장 해탈문 : 여러 가지 간청하는 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해탈법.
반 배 : 큰절이 아닌 허리를 굽혀 반만 절 하는 것.
빠라미타 : 산스크리트어로, 지혜의 바다. 바라밀다.
무릎걸음 : 꿇은 무릎으로 걸어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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