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이(시인)

아파트에 살며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가다 다른 사람이라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쓰레기봉투를 뒤로 감추고 한발 물러서게 된다. 날이 따듯해 지면 더 곤혹스럽다. 하루만 안 버려도 냄새가 나고 날파리가 생긴다.

음식물쓰레기가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 시골에서는 쌀뜨물 한 바가지 밥알 한 톨을 버리지 않았다. 모두 돼지의 먹이로 썼다. 지금도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해 일부는 가축의 사료로 만든다고는 하지만 각종 이물질이 섞여 있고 부패하기 쉬워 쉽지 않은 일이라 들었다. 또 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하나 이 또한 경제성이 떨어져 크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재활용도 매립도 소각도 어려운 음식물쓰레기의 처리는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 직장 일에 지쳐 있을 때 도망치듯 선수련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공기 좋은 사찰에 들어가 며칠 쉬었다가 오고 싶은 마음에 덜컹 휴가를 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새벽예불로 시작하는 수련회 일과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듯한 느낌이었다. 새벽 백팔배와 전나무 숲길에서의 삼보일배는 다시 해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참선 때 다리가 아팠던 것 말고는 내가 전생에 스님이었나 할 정도로 잘 적응해 나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발우공양이다.

사전에 들어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체험해 본 발우공양은 참 특이하고도 재미있는 식사방법이었다. 식사할 때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 발우를 들어 입을 가리고 먹어야 했다. 수저를 부딪치는 소리를 내거나 음식을 씹는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밥알 한 톨 고춧가루 한 조각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이 발우공양의 압권은 식사 후 자기가 먹은 발우를 미리 받아 놓은 물과 남겨 놓았던 단무지 한 조각으로 깨끗하게 닦아 낸 다음 그 물까지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설거지 한 물까지 다 마셔야 한다. 그리고 남은 물로 발우를 씻고 그 물을 청수통에 다시 붓는데 청수통에 고춧가루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를 지도 해주신 스님께서는 절 아래 계곡물에 청수를 받아먹고 사는 아귀가 사는데 아귀의 목구멍이 바늘구멍보다도 작아 고춧가루가 하나라도 있으면 목에 걸려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청수통에 눈에 보이는 음식물 찌꺼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수련생들이 모두 그 물을 나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 모두 청수통을 검사하시는 스님의 얼굴을 숨죽여 지켜보던 기억이 새롭다.

새삼 그때 일을 떠올리며 발우공양에 담긴 뜻을 혼자 헤아려 본다. 당시에는 음식이 지금보다 훨씬 귀했을 것이다. 그러니 귀한 음식물을 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컸을 것이다. 이 귀한 음식을 여러 스님이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까닭에 밥알 한 톨 버려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 따른 질서 있는 식사 예법도 필요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함께 나누는 절제된 식사 예법이 발우공양으로 남아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흘렀어도 발우공양의 정신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청빈과 감사, 배려와 사랑 그리고 생명존중과 지구 환경보호의 교훈까지 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누군가의 몸이다. 누군가의 살이고 누군가의 피다. 이 귀한 살과 피를 이렇게 코를 막고 버려야 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만 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각종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한쪽에서는 여전히 굶주림이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는 쓰레기 등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모두 발우공양의 뜻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더 아끼고 덜 탐욕스러웠으면 좋겠다. 새삼 발우공양에 담긴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여기 공양 때마다 외우던 게송을 찾아 적어 본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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