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채(문학평론가)

‘바쁜 직장인’, ‘놀 시간 없는 초등학생’, ‘손주 돌보미 할머니’ 등등, 언제부터인가 떼어놓을 수 없는 고유명사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늘어난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졌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는 하지만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거기에다 소란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으니 우리는 정신 없이 하루하루 산다. 그야말로 살아낸다. 필자만 해도 하루에 서너 가지 종류의 일을 한다. 해치워야 한다고 할까. 그러니 우스갯소리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푸념할 때가 있다. 바쁘지 않으면 불안하고, 느리게 가면 뒤처질지 걱정한다. 왜일까. 내가 나를 억압하는 꼴이 아닌가. 이럴 때는 두어 시간만이라도 산문에 기대어 있고 싶어진다.

한 해 남짓 전, 템플스테이를 했다. 그 또한, 프로그램이 짜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초면의 남녀노소 따로따로인데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고 허물없이 속 이야기를 꺼내고 위로와 응원을 나누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가슴 따뜻한 체험이었다.

그러고는 탑돌이가 기억에 남는다. 합장하고 게송 한마디를 읊조리며 탑을 돌다 보니 달빛 아래 탑 그림자보다 내 그림자가 더 길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몸에서 허깨비 같은 여러 생각이 빠져나와 바닥에 드러눕는 걸까.

내 마음 빈자리에 찻물을 올립니다

찻잔에 찰랑이는 그윽한 숲의 미소

부처님 보이지 않아도 이곳에 와 계십니다

-김민정, <적멸보궁> 부분

탑돌이를 하는 내 마음 빈자리에도 부처님이 와 계실까. 산사는 적멸에 깊이 들어 있었다. 내친김에 불탑 제재의 한 시조 한 편을 더 본다.

저 느린 풍화 자락 만져 본 적 있는 건가

천 년의 햇살 바람 긴 시간을 고여 놓고

말없이

미소를 짓는

태연함이 여유롭다

더 깊은 혜안으로 바라본 적 있었는가

한 생이 가고 오고 억겁이 쌓인 흔적

부처도

비움을 지고

풍경 소리 내고 있네

-김태희, <미륵 탑> 전문

느림, 천 년, 햇살, 바람, 미소, 태연, 여유, 혜안, 억겁, 흔적, 비움, 풍경, 소리, 그 어디에 허겁지겁하고 소란하고 불안하고 안타까움이 있는가. 억겁이 지나는 데도 “천 년의 햇살”은 미소만 짓고, “한 생이 가고 오”는 데도 별일이 아닌 듯 고요하다. 이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흩어짐과 모임에도 흔들림 없는 불탑의 “비움”은 제소리만 내고 있다. 그 혜안은 얼마나 깊은 것일까. 티끌만 한 소란에도 심신이 고달파지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가 부끄럽기만 했다.

잘 알다시피 불탑은 붓다의 열반 이후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탑돌이는 붓다의 공덕을 기리고 소원을 비는 일이다. 붓다 재세 시로부터 이어져 온 의식이며, 통일신라 때는 세시풍속으로까지 확산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얼마나 화평했을까.

《구잡비유경》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한 국왕이 매일 백 번 불탑을 도는 것으로 수양을 삼았다. 어느 때 탑돌이를 하는 중에 다른 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는데, 국왕은 탑돌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나라 군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국왕에게 무슨 계책이 있겠다고 생각해 군대를 철수했다. 이 국왕은 “사냥하는 일은 끓는 솥과 같고, 향을 사르고 등을 켜며 탑을 도는 것은 찬물을 가져다 끓는 물에 쏟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탑돌이는 끓는 물에 찬물을 붓는 것처럼 고통을 평정하는 선행의 의미와 신앙의 공덕이 있다고 한다.

요즘같이 팍팍한 세상에는 탑돌이 문화가 더욱 그립다. 광화문 한복판에, 도심 네거리마다 불탑을 세우고 시민들이 퇴근길에 탑돌이하면서 고단함과 걱정 따위를 덜어내고 가벼운 심신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러면 해맑은 새 아침을 합장으로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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