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의 ‘상춘곡’

 

입춘(立春)이 지나 경칩(驚蟄)을 앞둔 시점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나목(裸木)에서 신록(新綠)이 돋길 바라게 되고, 그래서인지 책장에서 윤대녕의 소설집을 꺼내서 읽게 된다. 젊은 날의 애틋한 사랑에 보내는 서간문인 〈상춘곡〉은 선운사 주변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자는 ‘4월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는 여자의 말에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편지를 쓴다.
화자는 선배인 화가 인옥의 전시회에서 한 화가가 외는 《법성게》와 《천수경》을 고즈넉한 기분으로 들으면서 10년 전 봄 선운사 석상암에서 문지방에 목을 걸고 자빠져있을 때 찾아들었던 연둣빛을 떠올린다. 당시 화자는 인옥의 소개로 최란영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협박과 같은 사랑고백을 한다. 화자는 곧바로 선운사 석상암에 내려가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보름을 보내고 화자는 아침에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두빛 봄 햇살의 속삭임을 듣는다. 공감각적 표현인 ‘연두빛 봄 햇살의 속삭임’은 다름 아닌 그녀가 오는 빛이자 소리였던 것이다.
둘은 열애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이라는 떠들썩한 시국으로 멀어진다. 훗날 화자는 란영이 살고 있는 괭이밥나무 집을 찾아가 어렵게 말한다.
“멀리도 가까이도 말고 그저 계절이 바뀔 때만이라도 한 번씩 봤으면 싶군요.”
화자는 그녀와 사랑을 나눈 곳인 선운사를 다시금 찾는다. 선운사에서 그는 벚나무 길에서 애 밴 여인네를 본다.
“어여쁘더군요. 그녀를 보며 왜 내가 또 당신을 떠올렸을까요. 10년 전 내 아이를 가졌을 때의 당신 모습을 말입니다. 그 아기의 애비는 오늘처럼 엄마 옆에 없었지요. 그리하여 아이는 어느 날 돌부처가 되어버리고 도솔암 동백 한 송이거나 잉어 한 마리로 환생해 오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봅니다.”

〈상춘곡〉에는 미당 서정주가 직접 등장한다. 만세루를 서성이는 화자와 미당 서정주는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눈다.
“동백은 폈던가?”
“아직 안 피었습니다.”
“음, 그래? 하지만 나는 벌써 보고 가네.”
미당 서정주의 떠나는 모습을 보며 화자는 생각한다.
‘아 , 나도 벚꽃을 보았으니 오늘내일엔 돌아가야 할까 보다, 라고…….’
다소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윤대녕 작가는 특유의 문체미학으로 아련한 옛사랑의 노래로 승화하고 있다.
〈상춘곡〉에서 꽃은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고 믿게 되는 화자 마음의 꽃일 것이다.

〈상춘곡〉에 차용된 메타포인 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전문이다. 선운사에 동백꽃을 보러간 화자는 동백꽃은 피지 않아서 보지 못하고 대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만 듣고 돌아온다. 이 시편의 백미는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 “작년 것”으로 남았고,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다는 대목이다.
미당 서정주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찰나와 영원이 다르지 않은 심미안적(審美眼的) 세계의 절경’을 보여줬다.
미당 서정주가 역설한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지만 영적으로는 분명히 있는 무(無)’, 바로 ‘아무 것도 없이 기막히게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의 시발점이자 도달점인지도 모르겠다.
윤대녕은 〈신라의 푸른 길〉이라는 작품에서 〈헌화가〉를 차용했다. 그런데 〈헌화가〉를 현대문학에서 차용한 모범적인 선례가 미당 서정주의 〈노인헌화가〉이다. 따라서 〈신라의 푸른 길〉 역시 미당 서정주에게 크게 영향 받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라의 푸른 길〉의 문학적 성취도 영원성을 희구하는 데 있다.

“길에 끝이 어디 있으랴. 혹은 가다 말고 아무 데서나 천막 하나 치면 되지. 너를 어디 가서 만나랴. 거기 천막에 혼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아야겠지.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감으면 보이겠지, 마침내 푸른 사랑도 바다도. 목에서 염주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쯤이면.”

한국 단편소설 중 최고 문체미학으로 평가받는 위 문장에서 염주는 율무 염주이다. 선사들은 율무 염주를 목에 걸고 인적 끊긴 숲속으로 들어가 낙엽을 좌복 삼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열반하였다. 선사들의 율무 염주는 땅에 떨어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싹이 튼다. 그래서 스님들은 산길을 가다가 율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반야심경〉을 독경했던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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