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비구니 바일제 불공계 제49~50조

전법 일환 방편 쓰지만 지나친 경우 많아

 

비구니 바일제 불공계 제49조와 제50조는 외도(外道)의 주술(呪術)과 관련된 계율이다. 먼저 제49조 송학주술계(誦學呪術戒)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비구니라 하더라도 축생주(畜生呪)를 배우면 바일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축생주(畜生呪)’란 빨리어 띠라차나윗자(tiracchānavijjā)의 한역으로 외도들이 배우는 무의미한 것을 뜻한다. 단어를 구분해서 보면 띠라차나(tiracchāna)는 ‘짐승’, ‘축생’이란 뜻이고, 윗자(vijjā)는 ‘밝은 지혜’, ‘명지(明智)’, ‘비법(秘法)’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본 조문에서는 ‘비법’으로 해석하여 축생주를 짐승이나 축생의 주술, 비법 같은 것이 하찮고 의미 없음을 말하고 있다. 《빨리율》의 조문 해석에 따르면 다라니(陀羅尼, dhāraṇa)나 호주(護呪, paritta)는 축생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이를 배우는 경우에는 계율에 저촉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전법의 일환으로 방편을 사용한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설하실 때 법을 듣는 이의 근기에 맞게 여러 방편으로 설하셨다. 초등학생에게 대학생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요즘 불교계에서는 방편이란 단어를 너무 남용하고 있는 것 같다. 방편이 승려 자신의 술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매한 사람들은 삿된 주술에 걸린 듯이 그것을 맹신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십바라밀에는 방편이란 말이 나오지 않지만 대승불교의 십바라밀에는 육바라밀의 완성 이후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방편이 등장한다. 일곱 번째 바라밀인 것이다.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은 《해심밀경(解深密經)》, 《성유식론(成唯識論)》과 같은 유식(唯識)계 경전과 논서, 그리고 《화엄경》 등에 등장하며 화엄십지와 십바라밀을 각각 연결하고 있다. 화엄에서 펴고 있는 논리로만 본다면 방편은 화엄수행의 52계위 중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40계위를 거치고 십지(十地) 보살이 되어 47번째 원행지(遠行地)에서 방편바라밀을 완성한다. 원행지 보살은 불과 3계위만 더 완성하면 부처의 계위인 등각(等覺), 묘각(妙覺)에 이르니 수치로만 보면 실로 엄청난 수행의 깊이가 있어야 함이 느껴진다.

또한 《법화경》과 《유마힐소설경》의 <방편품>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방편은 삿되지 않고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위한 것이고 중생을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방편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유마거사는 어떤 분인데 방편을 사용할까? 《유마힐소설경》의 <방편품>에는 ‘爾時 毘耶離大城中 有長者 名維摩詰 已曾供養無量諸佛 深直善本 得無生忍 辯才無礙 遊戲神通 建得總持 獲無所畏 降魔勞怨 … 住佛威儀 心如大海 諸佛咨嗟 弟子釋梵 世主所敬’라고 유마거사를 표현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유마거사는 무생법인을 얻어 자유자재하고 마군과 원수의 항복을 받았으며… 부처의 위의에 머물고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고 제자, 제석천, 범왕, 왕들이 공경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유마거사 정도의 수행력을 갖추어야 방편을 사용할 수 있고 방편이란 단어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깊고 오묘한데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자 함부로 방편이란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될 일이다.

축생주를 이야기하다 보니까 대승의 문턱을 넘어버렸다. 대승 교학이 필자의 전공은 아니지만 문득 필자의 교학의 스승인 송찬우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기억나 주제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갑자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교수님의 육성이 그립고 황탯국에 막걸리 한 병 비우시며 하던 살아있는 강의가 그립다.

-동방불교대학교 교수ㆍ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야대학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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