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⑬

開口卽說人是非 爲道違背 着心着淨 却是障道因緣
今記汝於一切 是此法門中 何名座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切境界上 念不去爲坐 見本姓不亂爲禪

입을 여는 즉시 사람의 시비(是非)를 말한다. 그러면 도(道)에 위배 된다. 마음에 집착하고 정(淨)에 집착하면 도리어 도(道)에 장애를 일으키는 인연을 짓는다. 이제 기억해 보라! 여러분은 모든 법문 중에 무엇을 선(禪)의 자리(:座)라 하겠는가? 이 법문에 일체의 걸림이 없어야 한다. 밖으로는 일체의 경계상에서 생각을 물리치려 하지 않는 것을 ‘좌(坐:앉다.)’ 라하고 본래 성품을 보기에 산란치 않음을 선(禪)이라 한다.

 

우리들은 주로 어떤 사람을 놓고 ‘옳고 그름’에 입각하여 입방아를 찢기를 좋아한다. 이분법적인 절대적인 선(善)과 악(惡)의 논제는 과연 역사 이래로 분명한 결론을 낸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도(道)에 위배 되기에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과도한 논쟁을 피해야 한다. 좌선에 대한 혜능의 독특한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차법문중일체무애(此法門中一切無碍)’의 설명을 ‘이 법문에는 일체의 걸림이 없으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그대로 받아드리게 되면 방금 전에 혜능이 정(淨)에 대해 정의한 ‘무착심(無着心)’의 가르침에 위배 되는 일이 발생한다. 즉 독자들의 판단은 ‘혜능의 법문이 장애가 없이 완전하니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된다.’라고 정해진 법이 생기게 되고 즉시 그런 자신의 판단에 집착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런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 법문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취지의 번역이 합당할 것이다. 곧 ‘이 법문에 머무름’이 없도록 마음챙김을 잘 유지하며 경청하라는 의미다. 이런 알아차림으로 깨어있는 의식의 상태는 그동안 죽은 듯 앉아서 집중만 하던 ‘좌선’에서 활발발(活潑發)에 의식이 깨어있는 ‘좌선’으로 전환될 수 있다. 앉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바깥의 수많은 경계가 다가와도 저항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받아드리는 일, 즉 오로지 마음의 본래 성품 작용만을 본다면, 내지 그런 알아차림의 힘을 기른다면 마음은 번뇌의 자극에도 산란치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단지 앉는 모양이나 시간이 목적이 되지 않는 진정한 ‘좌선’이라는 설명이다.

何名爲禪定 外雜相曰禪 內不亂曰定
外若有相 內姓不亂 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卽定 外離相卽禪 內不亂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의 번잡한 상(相)을 일러 선(禪)이라하고 안으로 산란하지 않음을 일러 정(淨)이라 한다. 밖으로 만일 상(相)이 있더라도 안의 성품은 산란치 않는다. 본래 스스로 맑고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접촉에 의한 경계의 결과일 뿐이다. 접촉하면 산란해지는데 상(相)을 여의면 산란치 않음으로 정(淨)이 된다. 밖으로 상(相)을 여의면 선(禪)이고 안으로 산란치 않으면 정(淨)이 된다. 밖은 선(禪)이요 안은 정(淨)임으로 선정이라 말한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해석이 있다. ‘밖의 번잡한 상(相)을 선(禪)이라 하고~’이다. 이본(異本)에는 ‘이(離)’[:外(雜)相曰禪]자로 된 것이 있다. 어떤 자료가 더 오래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니 어떤 것이 오기(誤記)한 것인지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잡(雜)’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번역했다. 오히려 ‘이(離)’자로 수정하여 번역하는 것이 백화체에서 갖을 수 있는 극적인 효과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단원의 핵심은 무엇인가? 밖의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산란하고 번잡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안으로 산란치만 않으면 그것이 선정의 상태라는 것이다. 밖의 대상을 고요하게 만들려는 욕구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선정(禪定)을 추구하는 이들은 밖의 경계를 고요하게 하려는 그 의도가 더 큰 산란함을 발생시키는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고 밖의 일을 정리하여 안을 고요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역으로 혜능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게 하는 가르침을 제시한다. 앞에서 좌선의 개념을 설명했을 때도 이와 같은 논리였다. 그리고 그 근거를 인간의 본래 성품은 청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가르침은 좌선 수행을 여러 번 실패한 이들에게 큰 자신감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래 청정함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에 집중하는 힘을 기르면 된다. 바깥 경계에 연연하려는 습성, 또는 두려운 감정을 해소하거나 도피하려고 또 다른 대상에 관여하는 위장 심리를 잘 알아차림 하여 그 위장 심리를 꿰뚫어 버리는 힘을 반복적으로 길러내야 한다. 마지막의 문장이 독특하다. ‘외선내정 고명선정(外禪內定 故名禪定)’, 왜? 선정을 내외로 구분했을까? 그런 이유 때문에 선정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앞 문장을 보면 안팎으로 고요해야 선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데, 말이다. ‘밖으로 상(相)을 여읜다.’는 말은 상(相)을 여의기 위해 상(相)에 개입하여 붙들리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는 ‘알아차림만’ 하는 방법이 있다. 알아차림 수행을 대부분 잘못하는 경우가 알아차림 한 것을 즉시 판단해 버리는 의식의 작용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찰나로 판단하는 분별심을 알아차림 하기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분명한 알아차림(sampajāna)’, 또는 ‘알아차림의 확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외부(대상)에 접촉되는 모든 것들이 상(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도 알아차림‘만’ 하는 힘이 있으면 마음은 고요하다. 그것은 본성이 고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안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다. 안팎 중에 하나만 정확히 수행하면 된다. 각자의 근기에 맞게 쉬운 쪽을 택해서 실천하면 된다.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둘을 같이 하려는 욕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우리는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維摩經云 卽是豁然 還得本心 菩薩戒云
本須自姓淸淨 善知識 見自姓自淨 自修自作
自姓法身 自行佛行 自作自成佛道

《유마경》에 말하길 ‘즉시 활연히 하여 돌이키면 마음의 본 성품을 얻는다.’ 보살계에 말하길 ‘본래 모름지기 자성은 청정하다.’ 하였다. 선지식아 보아라! 스스로 맑은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닦음을 스스로가 짓는다. 스스로의 성품이 법신이어서 스스로 행하는 부처님의 행으로 스스로 지어 스스로 불도를 이룬다.

‘견자성자정(見自姓自淨)’ 스스로 ‘자(自)’를 자기 ‘자신’으로만 번역하면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본성과 에고의 구분이 불분명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 가르침을 보자면 우리는 할 일이 없어 보인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다. 스스로 닦고 스스로 고요해지게 개입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이 유위법(有爲法)으로 시도하면 스스로의 기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스스로의 본성이 활성화 되도록 에고(ego)를 단속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활연히 돌이키는 일이다. 이 일이 전제되었을 때 스스로의 성품은 무난히 작동하여 에고(ego)를 잠재울 것이다. 하지만 에고(ego)의 힘이 잠시 필요할 때가 있다. ‘돌이킴’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때가 그것이다. 이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하다. 사실 에고(ego)는 자신으로 돌이키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단지 오감을 통해 대상으로 직진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이 에고(ego)의 정체성이다. 이 직진본능을 잠깐만 선회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노력이라는 기운을 내야 하는 귀찮은 일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의식작용의 전환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본성을 깨울 수 있게 된다. 이 두 요소가 순차적으로 힘을 발휘 할 때 스스로의 본성은 결국 불도(佛道)를 이뤄내는 데까지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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